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듣노라면 맨 처음 나오는 이 구절은, 싸늘한 밤공기를 상징하는 듯 한 긴장된 몇 개의 피아노음 다음에 나오는 것인데, ‘낯설다’ 의 뜻인 ‘프렘트’ 라는 이 형용사(여기서는 부사)의 그 낯 선 느낌이 더욱 추운 날씨에 어울린다. 대관령에 강 추위가 찾아 왔고 서울이 영하 12도 가까이 내려가니, 정말 이런 날은 내 몸과 정신이 따로따로 존재함을 느낀다(오늘이야 날씨가 좀 풀였지만 요 몇일간 느낌을 토대로 쓴글이니...) 특히 정신은 추위에 더욱 예민해지고 똑똑해져서 무언가 생각을 자꾸 하고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이런 겨울의 아침에는 삶과 사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들으면 5곡인 <보리수>나 6곡인 <넘쳐흐르는 눈물>, 혹은 11곡인 <봄꿈>, 혹은 13곡인 <우편마차>, 그리고 24번째 마지막 곡인 <거리의 악사>등을 골라 듣는데, 사실「겨울나그네」의 가장 강렬한 맛은 이 첫 곡에 있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우리가 독일어를 잘 알지 못하는 이유로 번역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지만 벨헬름 뮐러(Wilhelm Mueller 1794-1827)의 시는 겨울나그네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인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한 남자의 고독과 아픔’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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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곡 에서 <안녕>은 만나서 반가운 ‘안녕’이 아니라 헤어질 때 하는 ‘안녕’이다. 우리 말로는 너무 구분이 안되어 좀 뭣하지만, 만날 때의 안녕보다는 떠날 때의 안녕이 어딘가 서글프고 쓸쓸하고 허전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 피아노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그 말 ‘프렘트 빈 이히’가 가슴을 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것을 다 제쳐놓고라도 그 가사를 우리 말로 한번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짐승의 발자욱을 따르리
이 하얀 벌판에서
내가 왜 기다리며 서성이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날 쫓아낼 때까지?
길 잃은 개는 짖게 내버려 두자
자기 주인의 집 밖에
사랑은 방황을 좋아하네
신은 사랑을 그렇게 만들었네
이곳 저곳을 방황하도록
내 사랑 이제 안녕
나의 단꿈을 방해하지 않으리
나의 편안한 휴식을 흩트리지 않으리
발걸음조차 들리지 않도록
살며시 살며시 문을 닫고
떠나는 길에
그 문에 적어 놓으리 “안녕”이라고
그러면 넌 보리라
내가 너를 생각했었음을 |
이방인으로 이 고장에 왔다가
다시 이방인으로 나는 떠난다
화사한 꽃으로 가득찬 5월이
나를 반겨 맞아 주었고
그녀는 사랑을 속삭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결혼까지 약속했건만
이제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차고
길은 눈으로 덮혔네
난 내 여행을 떠날 때를 정할 수는 없지만
내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하네
이 어둠 속에서
달빛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함께
그를 벗 삼아 떠나리
이런 가사를 받쳐주는 음악은 역시 어둡다. 무겁다. 쓸쓸하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고 싶지만 체면 때문에 흘리지 못하는 우리 대한민국의 남자들에게 이 곡은 그 눈물을 마음으로만 흘리도록 해 준다. 굳이 억지로 눈물을 감추려 애를 쓰지 않아도 되도록 해준다. 우리는 이 곡을 들으며 우리가 삶의 무게로 해서 까닭도 없이 힘들어지던 그런 순간들을 피아노의 음 하나하나, 노래의 그 낯선 발음 하나하나에 실어 저 하늘 높이 날려 보낼 수 있다. 눈이라도 온다면 눈송이에 실어 땅으로 곱게 내려놓을 수 있다. 뭐 대한민국의 그 잘난 남성들이 무슨 울고 싶은 게 있고 무슨 나누고 싶은 고통과 슬픔이 있겠느냐고 하겠지만 아는 사람들은 안다. 그런 그들에게 오늘 아침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의 첫 곡을 가사와 함께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목소리로 보내드리며 보리수도 함께 올립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라며...여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