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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산에오르다/국내여행산행

첫눈 내린 경복궁 관람

광화문(光化門)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입구에는 양 옆에 해태상이 있고 그 뒤로 월대가 있다.

 

 

광화문 앞 해태상

광화문은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은 왕이, 좌우의 홍예문은 왕세자와 신하들이 각각 출입하였다. 또한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하였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6. 25 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1968년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하였다.

해태는 상상속의 동물로 옮고 그름, 선과악을 판단할 줄 아는 영물로 조선시대 관리들의 비리를 감시하라는 듯에서 세워졌다.

 

광화문 월대 (光化門 月臺)

월대는 궁궐의 정전 등 주요 건물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터보다 높게 쌓은 넓은 기단을 말한다.

통상 기단이라고 부르는 단을 월대라 부르는것은 각종 의식을 행하는 기능 외에도 건물의 위엄과 왕의 권위를 한층 더 높이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시설물로, 터보다 높게 쌓은 넓은 기단이기에 구분해서 월대라 한다. 월대는 왕과 사신이 만나고 출전 장군을  환송하고 개선장군을 환영하고 왕이 백성을 직접 만나기도 했던 소통의 장소이기도 하다.

 
 
 

경복궁(景福宮)

경복궁(景福宮)은 1392년 조선 건국 후 1395년(태조 4)에 창건한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法宮)이다.

경복궁은 백악산(북악산)을 주산으로 넓은 지형에 건물을 배치하였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가 펼쳐진 한양의 중심이었다. ‘경복’의 이름은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으며, 이곳에서 세종대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반포되기도 하였다.

경복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는데 그 후 복구되지 못하였다가 270여년이 지난 1867년(고종 4)에 다시 지어졌다. 고종대에 들어 건청궁과 태원전, 집옥재 등이 조성되었으며, 특히 건청궁 옥호루는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후 경복궁은 계획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하여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분으로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되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경복궁의 경관을 훼손하였다. 이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경복궁 복원공사가 진행되었고,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였으며 흥례문 일원, 침전 권역, 건청궁과 태원전, 그리고 광화문 등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흥례문과 근정문

 

 

흥례문

흥례문(興禮門)은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흥례’는 ‘예를 일으킨다’라는 뜻이다. 원래 흥례문의 이름은 ‘홍례문’이었으나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흥례문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철거되었다가, 199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 후 2001년에 복원하였다.

 

 

근정문과 근정전

 

 

근정문(勤政門)

근정문(勤政門)은 근정전의 정문으로 앞면 3옆면 2칸의 우진각지붕의 형태로궁궐 정전의 정문 중 유일하게 2층 규모로 지었다. 좌우에 행각이 둘러싸고 있고, 1395년(태조 4) 경복궁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 버려 1867년(고종 4)에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복원되었다. 

 

 

근정문 행각

 

 

근정전(勤政殿)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신하들의 하례외국 사신의 접견궁중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근정전의 근정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라는 뜻으로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근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두고 그 위로 중층으로 올린 건물로 안에서 보면 층 구분이 없는 통층(通層)이다.

근정전 앞마당즉 조정(朝廷)은 다른 궁궐의 정전과 같이 박석이 깔려있고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으며 조정에는 정1품부터 정9품까지의 품계석을 놓았다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 기둥에는 4신상과 12지신상을 포함하여 28수 별자리상 등을 간결하지만 재치있게 조각하였다. 내부 바닥은 전돌을 깔았고북쪽 가운데에 왕의 자리인 어좌를 설치하였다어좌 뒤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해와 달다섯 봉우리의 산이 그려진 일월오봉도를 놓았고 천장에는 칠조룡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근정전에서는 정종세종세조중종선조가 왕위에 올랐으며,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부지런히 정치하라' 는 의미의 근정(勤政)에서 명명한 근정전은 조선왕실의 상징이자 대표적인 건물이다.

 

수정전

한글 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이 있었던 곳으로 수정전(修政殿)의 ‘수정’은 ‘정치를 잘 수행하다’라는 뜻으로, 고종 대 편전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으나 고종 대 경복궁 재건시 지은 건물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가 들어섰고, 이후 의정부(議政府)가 내각(內閣)으로 바뀌면서 내각의 청사로 사용되었다.

 

경회루

경회루(慶會樓)의 ‘경회’는 ‘경사스러운 연회’라는 뜻으로, 경복궁 침전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열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으로 꾸몄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작은 누각이었으나 1412년(태종 12)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다시 만들었다. 성종과 연산군 대에 수리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중건하였다.

 

경회루의 1층은 48개(둥근 기둥과 네모난 기둥 각 24개)의 높은 돌기둥들만 세웠으며, 2층에 마루를 깔아 연회장으로 이용했다. 추녀마루에는 우리나라 건물 가운데 가장 많은 11개의 잡상(雜像, 지붕 위 네 귀에 여러 가지 신상神像의 모습으로 만들어 얹은 장식 기와)이 있다. 경회루는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눈꽃나무로 둘러 쌓인 경회루를 뒤로하고..

 

 

 

 

국립 민속박물관

상부는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을 하부 계단부위는 경주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를 참조하여 건축했다고 한다.

한민족의 전통 생활문화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한국 생활문화의 집약체'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왕족들의 고급 문화를 보여준다면 국립민속박물관은 역사책이 다루지 않는 서민들의 생활을 집중 조명한다. 이번에는 외부와 정원만 둘러보기로...

 

 

문인석

 

석물

 

연자방아

 

국립민속박물관 외관

 

 

지붕위 기와에도 담장의 기와에도 눈이 쌓여  전통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더욱더 멋진 풍경으로 만들어 주네요.

 

 

 

 

향원정

향원정(香遠亭) 향원 향이 멀리 간다라는 뜻으로, 원래 이곳에는 세조 대에 세운 취로정이 있었다. 그러다가 1873(고종 10)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그 앞에 연못(향원지)을 파서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고 2층의 육모지붕의 형태로 지었다. 

 

 

취향교

향원정을 가기 위해 지은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라는 뜻에 취향교(醉香橋)라고 불렀다. 원래 취향교는 무지개 모양의 흰색 다리로 조성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53년에 복원하였는데 향원정 남쪽으로 복원되었다. 

 

 

향원지 서북쪽에는 향원지의 근원이 되는 열상진원(洌上眞源)샘은 향원지를 시작으로 경회루 연못을 거쳐 경복궁 밖으로 흘러 나갔다. 향원정은 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향원정 우측으로 보이는 남산 서울 타워

 

 

취향교와 향원정

 

 

L to R 팔우정, 집옥재, 협길

집옥재(集玉齋)의 ‘집옥’은 ‘옥처럼 귀한 보배를 모으다’라는 뜻으로, 집옥재를 중심으로 왼쪽에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에 협길당(協吉堂, ‘협길’ : 함께 복을 누림)이 있다. 이곳은 1891년(고종 28)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이었던 집옥재와 협길당 등을 건청궁 서쪽으로 옮겨 지은 것으로, 고종의 서재와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장소로 사용되었다.

2016년  작은도서관으로 꾸며진 집옥채에는 조선시대 관련 책 1,000여 권과 왕실자료의 영인본 350여 권뿐만 아니라 외국인을 위한 우리 문학책의 번역본(영어·중국어·일본어) 230여 권을 비치했다. 팔우정에서는 궁중다과와 외국에서 인기 있는 우리 문학책의 번역본을 판매해 외국인들에게 경복궁의 아름다움과 함께 휴식 및 문화 체험을 제공한다.

 

 

 

 

 

 

향원정을 둘러보고 되돌아 나오는 길에 경회루도 한번 더 보고..

 

 

흥례문을 통과해..

 

 

광화문을 빠져 나와 광장으로 향하며 경복궁 관람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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