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속으로 떠나는 세계여행-파두(Fado)]를 찾아서..
어느 바다인지는 모르지만 죽어버린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며, 고뇌와
잃어버린것에 대한 향수를 노래한 Fado... 파두의 선율에 몸을 싣고 파두의 고향 리스본으로 여행을
떠나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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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do의 음률속에 깊어가는 리스본의 밤
Fado를 이해하려면 먼저 Fado의 고향인 포르투칼이 가지고 있는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할것이다.포르투칼은 B.C 8세기경 켈트인의 정착 이래로 수많은 외세의 침입과 오랜세월동안(약 428년간)의
무어인(회교도)의 지배를 받아오며 이들의 문화엔 아프리카적, 아랍적, 그리고 이베리아 고유의 로망스의 전통(오랜기간 로마의 지배영향)이 혼합된
다양한 문화적인 요소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포르투칼의 전성기라고 할수 있던 1415 ~1580년을 거치며, 많은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바다를 향하여 나가게 되었고 이후, 대서양, 태평양을 누비며 신항로의 개척과 아메리카 대륙으로 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바다는 포르투칼의 운명과도 같은것이 되어버린지도 모른다. 19세기 초에는 나폴레옹 군대가 침입, 왕실
일족이 브라질로 망명하는 수난을 겪었으며 나폴레옹 몰락 후에는 영국의 섭정으로 포르투갈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으나 1820년 국왕이 복귀,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었다. 1822년에는 최대의 식민지인 브라질이 독립을 선언한 뒤부터 포르투갈의 국력은 점점 쇠퇴해 갔으며 이러한 사회적·정치적
혼란속에서, 1908년에 국왕 카를로스 1세와 그의 왕자가 암살되었고 10년 총선거 후 공화파의 혁명으로 공화제가
성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군측에 가담, 참전하게 됨으로써 국력은 피폐해졌고 경제적 위기는 극도로 심화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독재정치를 유발, 26년에 군부 쿠데타에 의해 출현한 코스타 장군을 시작으로, 살라자르, 카에타노가 계속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40년
이상의 독재정치는 74년 4월 민주화 무혈 쿠테타를 계기로 막을 내렸다.
파두 |
파두는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내면」을 표현한다는 포르투갈의 민족대중음악 Fado는 "삶의 영원한 슬픔과
우울함"을 테마로 다룬 음악이다. Fado의 유래는 아프리카 노예들에 의해 브라질로 전해진 음악이 18세기 선원들에 의해 포르투갈로 전래되었고,
다시 이태리의 오페라 멜로디와 결합되어 만들어졌다고 한다. 초기에 Fado는 항구마을에서 선원들의 외로움과 향수를 절절이 담고 있는 노래말이
주종이었는데 지금은 포르투갈인의 한과 설움을 대변하는 대중적인 음악으로 정착하였다.
Fadista (Fado를 부르는 가수를
지칭)들은 대부분 검은가운을 입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 이유는 백작신분의 귀족 Vimisio와 사랑에 빠져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Maria라는 Fadista가 26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뜨자, 이를 애도하는 모든 Fado가수들이 그녀의 명복을 빌고자 검은 가운을 입고
노래했던 것이 기원이 되어 오늘날의 Fadista의 전통복장이 되었다고 한다. 어느 유명Fadista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슬픔은 바로
Fado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Fado는 포르투갈인들이 삶의 무게와 고단함등을 함께 나누고 느끼는 정말로 사랑 받고 있는 민족의
음악이다.
파두(Fado)의 기원 어떤 사람들은 파두가 오랜 옛날의 포르투갈 서정시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고 또는
뱃사람들이나 상상력이 풍부하고 명상에 잠기기 좋아하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읊었던 시에 파두의 기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들의 불안정한 삶이 그들을 이상주의자로 만들었으며 이로인해 그들은 자연히 시를 짓는 재능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읊는 시는 주로 운문조였으며, 그들 대부분은 즉석에서 되는대로 쉽게 시를 지을 수 있었고 그것은 바다에 나가, 자신들의 조국을 그리며, 파두의
리듬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뱃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결과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파두의 기원이 '룬둠(lundum)'에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룬둠이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포르투갈과 브라질에서 대유행했던 아프리카 춤을 말하는데 리스본 항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향했던 뱃사람들이 다른
민족과 접촉하면서 서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룬둠'과 '파두'를 전했다는게 그들의 얘기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기원을 갖고 있는
파두는 리스본 항구 근처에 있던 선술집 등에서 처음으로 불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선술집은 부랑인들이 모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과 그리움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파두는 선술집 뿐만이 아니라, 무도회장에서 그 시대 귀족들에 의해 불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쎄베라(Severa)라는 유명한 Fadista(파디스따: 파두를 부르는 사람, 파두 가수)가 있었는데 비미오주(o Conde de
Vimioso)라는 귀족이 그녀와 그녀가 부르던 파두에 매료되어 후에는 그녀옆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그녀를 따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후, 그는 귀족들의 무도회장에서 그녀대신 파두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각기 다른 환경을 거쳐 이렇게 알려지게 된 파두는 오늘날
대부분 희미한 불빛 아래, 슬픔에 잠겨 있는 듯 고요한 분위기의 파두집에서 불려집니다. 파디스따의 목소리는 감미로운 기타와 비올라 선율과 함께,
감상에 젖어 파두에 취한 청중들을 한층 더 고요하게 만들면서요.
포르투갈은 1640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과 1974년 무혈
쿠테타로 인한 승리의 영광을 뒤로 한채 고단한 역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런 침략과 압제의 역사 때문에 포르투갈의 음악 파두에는 슬프고
어두운 그늘이 숨어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포르투갈의 정서를 가르켜 사우다드(Saudade)라고 부르죠.
사우다드... 갈망, 동경, 향수, 슬픔과 외로움이 겹겹이 쌓인 포르투갈 특유의 '한'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파두에서 베어나는 슬픔의 근원을 바로 이 사우다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죠. 파두가 슬픔 운명이란 뜻을 지닌 'Fatum'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도 이와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우다드의 정서에서 우리는 포르투갈의 민중 감정을 엿볼 수도 있음은
물론이구요. 아무튼 세가지 문화권의 음악적 산물이 뒤섞인 예술양식으로 파두(Fado)를 보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우선 리듬은 아프리카로부터
수여받고, 감수성과 시적 노랫말은 포르투갈 전통 시인들로부터, 그리고 악곡형식은 브라질 음악으로부터 습득한 형태라고 보는 게 오늘날의 일반적
이해입니다.
또한 파두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그리스 신화의 영웅 오디세이가 세웠다는 전설의 도시 리스본을 중심으로 한
리스본 파두, 그리고 포르투갈 북부의 교육도시인 꼬임브라에서 성행한 꼬임브라 파두(Coimbra Fado). 이중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파두가
바로 서민들의 소박한 생활이 투영된 리스본 파두입니다. 포르투갈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불려졌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Amalia
Rodrigues)가 바로 이 리스본 파두의 대표적인 인물이죠. 흔한 사랑타령에 목말라 하지 않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중의 애환을 노래했던
그녀를 통해 우리는 파두를 만났고 파두의 그 속내깊은 사연에 마음이 흔들리곤 했습니다.
대표적인 Fadista(Fado를
부르는 가수를 지칭) ▣ Amalia Rodrigues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파두는 나의 생활 태도. 나의 시. 그 시는 나이를 먹어 가지만,
어린 시절 언제나 노래를 노래하고 있었어요. 나에겐 아무것도 없어서 궁핍했어요. 그래서 노래한 거예요. 그리고 나는 파두를 찾아냈고, 그후 계속
해왔어요."
" 클래식 음악 라디오국에서, 나의 특집을 만들었어요. 포크 가수로서는 개국이래 처음이었죠. 마리아 세베라와 아마리아
로드리게스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가수라더군요. 한 일주 정도는 기분이 좋았죠."
본명 : 아마리어 레보르단 피에다드
로드리게스. 포르투갈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불려졌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Amalia Rodrigues)가 바로 이 리스본 파두의 대표적인
인물이죠. 흔한 사랑타령에 목말라 하지 않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중의 애환을 노래했던 그녀를 통해 우리는 파두를 만났고 파두의 그 속내깊은
사연에 마음이 흔들리곤 했습니다.
1999. 10. 7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 이제는 정말 전설속의 인물이 되어 버린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그녀의 죽음이 확인되자 마자 포르투칼 정부는 즉시 3일 동안의 국가 애도기간을 공포하였습니다. 아무리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가수가
죽는다 한들 우리라면 단 하루인들 국가 애도기간을 결의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아니 설령 정부가 그런 결정을 내린다 한들 국민들이 수긍하겠습니까?
그러나 포르투칼 국민들은 정부의 이러한 결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파두(Fado)라는 그들의 민속음악을 세계적인 음악으로
끌어올린 아말리아를 포르투칼 국민들은 단순히 스타라거나 가수라 부르지 않고, 'Fado의 대사' 혹은 '20세기가 낳은 포르투칼 최고의 웅'으로
불렀고 그녀는 그 정도로 포르투칼 국민들의 절대적사랑을 받는 여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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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vinda(베빈다) 포루투갈에서 태어난 베빈다는 태어난 지 2년만에 프랑스로 이주했다. 바꿔 말하면 어린
시절 그녀는 직접적으로 포르투갈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지닌 조국 포르투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10대
시절 처음 직업 가수의 길에 들어섰을 때도 출발점은 샹송이었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수도 있고. 어쨌든 그녀의 음악은 파두의 기반 위에 샹송과
탱고, 보사노바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녹아들어 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특히, 프랑스에서 오랜 생활을 한 것은 조국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갖게 했으며, 그녀의 음악이 지닌 다양함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다른 파두 뮤지션에 비해 재즈, 클래식적인 감성이 짙게 배어있는 베빈다의
음악은 이 점을 충실히 뒷받침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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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ia(미샤) 뮤직홀의 댄서였던 할머니, 발레 댄서였던 어머니의 예술적인 영향을 받은 그녀는 향수와
강한 힘이 깊게 배어있는 파두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을 지니고 있었고 그리하여 파두를 부르게 되었다. 1991년 파두의 매력을 가득 담은
데뷔앨범 ‘Misia’를 발표하며 등장한 미샤는 주로 자신의 고국인 포르투갈에서 활동해 왔고 1998년 ‘Garras Dos Sentidos’
앨범을 통해 정식으로 세계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파두의 여신 미샤 [히뚜알] 이전에 파두를 들어본 적이 없다면, 미샤의
음반을 들어보라. 이는 매혹적인 파두의 세계로의 훌륭한 지침이 될 것이다. -그라모폰 미샤의 [히뚜알]은 감성이 충만한 음반이다.
완벽하다. 미샤가 하늘을 노래하자, 그녀의 메로디는 하늘의 별이 되었다. -빈 차이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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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redeus(마드리듀쉬) 데뷔 앨범 'Os Dias Da Madredeus'(마드리듀쉬의 날들)를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이어 2집 Existir(존재)의 수록곡 'O Pastor(목동)'가 포르투갈 차트 1위에 오르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또한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리스본 이야기(Lisbon Story)에서는 멤버들이 직접 출연도 하고 영화 음악도 담당했죠.
기타리스트 / Fedro
Ayres Magalhaes 싱어 /Teresa Salgueiro . 키보드 / 카를로스 마리아 트린다쥐(Carlos Maria
Trindade), 기타 / 주제 펙스투(Jose Peixto), 어쿠스틱 베이스 / 페르난도 주디세(Fernando
Jud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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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
포르투갈의 수도로 이 나라 최대의 도시이며 유럽대륙 대서양 연안의 유명한 항구도시 중
하나이다. 일찍이 페니키아·그리스·카르타고 시대부터 항구도시로서 알려져 왔으며, BC 205년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714년 이래로는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다가, 1147년 알폰소 1세에 의해 해방되었다.
15∼16세기 해외진출시대에는 유럽 유수의 상공업 도시가 되었다.
1755년의 지진과 화재 등으로 시가지의 2/3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역사적인 건조물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의 도시는 18C의
대지진 후 죠만 1세의 명에 의해 바둑판 모양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러나 구시가에 들어서면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유럽공동체(EC)는
94년도의 유럽문화도시로 이곳을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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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베르다데 대로 (Avenida de Liberdade) |
리베르다데 대로는 폼발 후작 광장에서
레스타우라도레스 광장까지 약 90m의 폭으로 1.2km 이어지는 거리로 리스본의 중심 거리이다. 광장은 에두아르도 7세 공원으로 이어지며, 거리
양편에는 항공사, 영화관, 호텔 등의 주요기관 및 건물들이 위치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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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두아르도 7세 공원( Parque Eduardo VII) |
1902년 영국의 에두아르두(에드워드) 7세가 리스본을 방문한 기념으로 조성된 공원으로
리베르다데 대로 끝 부분에 위치해 있다. 공원 정상에 서면 리스본 시내와 테주 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프랑스식 정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기하학 무늬의 화단이 이채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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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로시오 광장 Rossio |
시내 번화가 중심에 위치한 로시오 광장은 중앙에 브라질 의 초대총독 페드로 4세의
동상이 서 있어서, 원래 '동 페드루 4세 광장'으로 이름붙여 졌으나, 현재 로시오 광장이라고 더 많이 불리고 있다. 리베르다데 대로와 바이샤
지구에 맞닿아 있다.
13세기부터 리스본의 중심지였으며, 공식행사를 비롯하여 종교재판 등도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이 광장에는
Baixa지구의 메인 광장으로 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는데 크게 기여한 퐁발 후작의 계획에 따라 18.19세기에
만들어진 건물이 늘어서 있다. 현재 이 건물들은 함부로 개축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 당시의 건물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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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레스타우라도레스 광장 (Praca dos Restauradores) |
17C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광장으로, 중앙에는 높이 30m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리베르다데 대로남쪽 끝에 위치하며, '레스타우라도레스'라는 이름은
'복고자', '부흥자'의 뜻으로, 1640년 스페인의 지배에 대항해 포루투갈의 독립을 위해 싸운 지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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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퐁발 후작 광장(Praca Marpuess de Pombal) |
중앙에 리스본 대지진 후 도시계획을 세워 공로를 세운 퐁발후작의 동상이 서 있는
광장이다. 리베루타테 대로를 기점으로 3개의 대로가 Y 자형으로 발달한 광장으로, 에두아르두 7세 공원에 인접하고 리베르다데 대로의 기점이
되며, 리스본 교통의 중심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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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코메루시오 광장(Praca do Conercio) |
바이샤 지구 내에 있는 리스본 최대 넓이의 광장으로, 떼주강과 마주하고 있다.
퐁발후작의 도시계획에 의해 궁전 자리에 들어선 광장으로, 일찍이 왕궁 테라스가 있었던 아름다운 광장으로 유명하다. 퐁발후작의 전형적인 스타일에
따라 고전적이고 통일된 아케이드 식으로 지어진 광장이다.
북쪽에 개선문, 중앙에 아비슈 왕조의 창시자이자 퐁발 후작을 기용하여
도시계획을 창안해낸 장본인, 죠안 1세의 동상이 서 있으며, 광장의 삼면을 둘러싸는 건물들은 현재 정부의 각 기관, 해군성, 정부관서,
우편전신국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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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사원 (Se Cathedral) |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알파마 지구로 가는 중도에 있다. 12세기 그리스도 교도가
이슬람 교도로부터 리스본을 탈환한 뒤 건축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견고한 대사원이다. 내부와 외부 모두 로마네스크 양식이 주를 이루며, 1755년의
대지진 때에도 치명적인 손상을 면하여, 제단만 다시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하였다. 디니스왕의 명으로 고딕 양식으로 지은 회랑 및 여러 양식이 섞여
있어 오랜 역사의 변천을 볼 수 있다.
정문 입구 위쪽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장미의 창'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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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구시가 (알파마 지구) /알파마 지구 Zona de Alfama 주변 |
18C의 대지진 후 대대적인 퐁발 후작의 도시계획이 있을 때에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그전 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지구로서, 16∼17C의 건물이 남아있다. 로마시대부터 중심지였던 곳으로, 어둡고 구불구불하며, 좁은 거리 등은 여지없이 옛
리스본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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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성 죠르주 성(Castelo de Sao Jorge) |
알파마 지구 끝에 위치한 성으로,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처음 5세기 때 성이 창건되었으나, 그 후 무어인들에 의해 축조된 고성으로, 군사적 이점이 있어 요새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성문 안쪽 전망대
광장에는 이 성을 함락시킨 포르투갈 초대왕 알폰소 엔리케의 동상이 있고, 북쪽에는 성 함락의 공로자 마르팀 모니스장군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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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도스 비코스 관 |
알파마 남쪽 지구의 외벽이 온통 새의 부리같은 뾰족한 돌로 뒤덮여 있는 성관으로, 그 모양에 따라 '부리의 집'
이라도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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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제로니모 수도원(Mosteiro dos Jeronimos) |
리스본 시내 떼주 강변의 베렘의 임페리오 공원에 위치한 흰색의 대사원이다.
대항해시대의 선구자 엔리케 항해 왕자가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장소로서 예배당을 건립하였고, 또 인도항로를 발견한 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수도원은 매우 호사롭다. 바스코다가마 의 석관도 안치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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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해양 박물관 |
제로니무스 수도원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배의 모형이나 항해 용구, 지도 등 항해에 관한 전반적인 전시물이 시대별로
분류되어 보존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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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발견 기념비 (Padrao dos Descobrimentos) |
제로니무스 수도원 앞 임페리오 광장을 지나 떼주강변에 있는 기념비로, 벨렘탑 옆에 위치하고 있다.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떠난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1960년 엔리케 항해왕 사후 500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높이 53m의 기념비이다.
항해중인 배 모양을 하고 있는 이 기념비에는 엔리케 항해왕을 비롯하여, 신천지 발견에 공이 큰 모험가, 천문학자, 선교사 등의
수많은 인물들이 줄지어 조각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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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벨렘의 탑 (Torre de Belem) |
16C 초 엠마누엘 1세가 항구를 감시하기 위하여 떼주강변에 세운 요새로, 발견기념비에서 테주 강 하류
쪽으로 1km 거리에 있다. 바스코다가마가 인도를 향해 출범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1515~19년에 건설된 이 탑은 하얀 나비가 물 뒤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누엘 양식의 건축물로, 처음에는 물속에 세워졌으나, 떼주 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물에 잠기지 않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3층높이의 탑으로, 지금은 16~17세기의 가구가 전시되어 있는 아름다운 테라스가 있는 3층은 옛날 왕족의 거실이었으며, 2층은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벨렘의 마리아 상'이 있고, 1층은 스페인이 지배하던 시대부터 19세기초까지 정치범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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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마차 박물관 |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마차박물관으로, 제로니모 수도원 동쪽에 위치해 있다.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1816년 지어진 것이고, 유럽 전역의 왕후, 귀족들이 1619년 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사용했던 마차를 모아둔 진기한 박물관이다. 약
60량의 마차가 전시되어 있으며, 마차의 숫자로는 세계 최대를 자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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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아주다 궁전( Palacio Nacional da Ajuda) |
아주다 언덕에 세워진 이 궁전은 원래 1761년 목재를 주재료로 하여 지은 궁전이었다. 현재의 모습은 1794년
불에 타 소실된 후 19세기 초 다시 건축한 것이다. 현재 정부의 영빈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이 곳은 19세기 후반부터 왕궁으로 사용되다가
1908년 카를로스 1세의 암살사건 이후 공화국 정부의 소유가 된 곳이다. 마차박물관에서 1km거리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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