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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리아 로드리게스(Amalia Rodrigues)는 파두 음악이 막 형성되던 1920년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리스본의 알파마 빈민지역에서 10남매 중의 하나로 태어난 그녀는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과일을 팔고, 재봉사 일을 하며 생업전선에 뛰어들게 되고 15살이 되서야 비로소 노래 부르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4년 후 그녀는 레티로 다 세베라(Retiro da Severa)라는 이름을 가지고 정식으로 가수 데뷔를 하게 된다. 그녀의 음악적 재능은 곧바로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그녀의 명성이 점차 퍼지게 되면서 1944년에는 마드리드와 브라질로 초청을 받아 공연을 하게 된다. 그리고 브라질에서 처음으로 스튜디오 녹음을 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그녀는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영화계에도 진출하여 많은 영화에도 출연하였으며(영화배우로서 그녀의 경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남미로 투어를 다녔다. 1951년 고국 포르투갈에서 첫 레코딩을 하기도 했다. 1955년에는 'Coimbra'가 국제적으로 히트하여 그녀는 프랑스 파리의 올렝피아(Oympia)극장에서 공연을 갖게 되면서 그녀뿐만 아니라 파두라는 포르투갈 음악도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후 그녀는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국, 소련, 이탈리아, 브라질, 일본 등 여러 나라를 돌며 공연을 가져서 70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그녀의 곡을 모은 많은 컴필리에이션 음반이 발매되면서 전 세계의 많은 팬들은 그녀의 오랜 음악인생을 기억하고자 했으나 그녀는 병마와 싸우며 내내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결국 1998년 리스본 엑스포에서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후 1999년 10월 6일 7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포르투갈의 수상 앙토니오 구테레스(Antonio Guterres)는 3일간의 국장(國葬)을 선포하여 '포르투갈의 목소리'인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에 대한 예우를 보여주었다.
아무리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가수가 죽는다 한들 우리라면 단 하루인들 국가 애도기간을 결의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아니 설령 정부가 그런 결정을 내린다 한들 국민들이 수긍하겠습니까? 그러나 포르투칼 국민들은 정부의 이러한 결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파두(Fado)라는 그들의 민속음악을 세계적인 음악으로 끌어올린 아말리아를 포르투칼 국민들은 단순히 스타라거나 가수라 부르지 않고, 'Fado의 대사' 혹은 '20세기가 낳은 포르투칼 최고의 웅'으로 불렀고 그녀는 그 정도로 포르투칼 국민들의 절대적사랑을 받는 여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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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곡 순 서 - 2 01. Naufragio 02. Primavera 03. Nem As Paredes Confesso 04. Barco Neg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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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페루에서 죽다[http://blog.daum.net/zydeco]
전통과 현대를 잇는 신세대 파디스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뒤를 잇는 신세대 파두 가수들의 활약덕분에 파두는 아직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후계자로 거론되며 안드레아 보첼리와도 뚜엣으로 노래할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둘쓰 폰뜨스(Dulce Pontes), 기타하(guitarra) 외에도 아코디언, 첼로, 신디사이저 등 다양한 악기를 도입해 파두를 현대적인 모습으로 발전시켜가고 있는 베빈다(Bevinda), 미샤(Misia)등..
전통과 현대를 잇는 아름다운 신세대 파디스타들 덕분에 영어권의 팝음악이 전세계 음악시장을 주도해 나가고 있는지금, 빠르게 변화해가는 문화 환경속에서도 자신들 고유의 향기를 잃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껴앉으려는 노력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음악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파두(Fado)...베빈다(Bevinda)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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