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07. 1. 15, 날씨 맑음. 구간코스 대관령 - 새봉 - 선자령 - 곤신봉 - 동해전망대 - 매봉 - 소황병산 - 노인봉 - 진고개 (산행거리 : 25.8 km, 산행시간 : 10:00 대관령 출발, 16:30 진고개 도착, 6시간 30분 소요) 교통편 동서울터미널에서 07:10분 발 횡계행 버스 탑승, 09:40 횡계도착 후 택시이용 대관령으로 이동(요금 6,000원) 산행종료 후 진고개에서 택시이용(진부택시, 011-379-4927) 진부로 이동, 진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8:25분 발 동서울행 버스 탑승, 20:40분 동서울 도착, 대굴대굴 굴러서 넘는다는 '대관령' 강원도 평창군(平昌郡) 도암면(道巖面)과 강릉시(江陵市) 성산면(城山面)의 경계에 있는 고개. 해발고도 832m. 영서와 영동을 연결하는 영동고속도로 동쪽의 마지막 고개이다. 대관령지역은 태백산맥 동쪽 해안산맥의 중부로서, 황병산(黃柄山)·노인봉(老人峰)·선자령(仙子嶺)·발왕산(發旺山)에 둘러싸인 분지로 동쪽은 대관령이 경계이고, 서쪽은 싸리재[杻峙(유치)]가 경계를 이루는 고위평탄면지형(高位平坦面地形)이다. 연평균기온은 6.1℃이고, 연강수량은 1450㎜이며, 무상기간(無霜期間)이 짧아 9월이면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언다. 춥고 비가 많은 편이며 봄과 가을이 짧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대관령은 대령(大嶺)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동쪽 경사면의 도로는 <아흔아홉구비>라고 한다. 정상에는 대령원(大嶺院), 횡계리에는 횡계역이 있어 험준한 교통로에서 여객의 편리를 도모하고 있다. 또한 한국 유일의 고랭지시험장이 있어 작물의 시험재배와 소·양의 사육시험도 하고 있다. 『야후 백과사전 에서』 대관령 국사성황당비 대관령 KT 철탑 뒤돌아본 능경봉(좌) 고루포기산(우) 저 멀리 새봉이 보이고 상고대 저 멀리 선자령이 보이고 선자령 정상의 이정표 겨울이면 등산객으로 북쩍대는 선자령, 기다려도 짬이 안나 셔터 꾹.. 선자령에서 한컷 선자령에서 곤신봉 오르는 길에 있는 바람개비 곤신봉 오르다 뒤돌아본 선자령 동해 전망대 동해 전망대의 간이 매점 동해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릉시 매봉을 내려가며.. 소황병산 초입 소황병산 정상 소황병산에서 바라본 풍광, 앞쪽 제일 높은 곳이 노인봉, 뒷줄 좌측이 동대산, 중앙이 비로봉이고 , 우측이 두로봉이다. 소황병산을 내려가며... 멋지게 핀 상고대 노인봉 산장..누룩으로 빗은 막걸리 맛이 Good, 비싼게 흠이지만(한잔에 4,000원) 노인봉 산장 조금 지나서 있는 이정표 노인봉에서 바라본 오대산 주능선 노인봉 노인봉에서 바라본 황병산 진고개 휴계소 진고개, 강릉시 연곡면과 평창군 도암면을 이어주는 고개로 오대산국립공원에 속해있다. 대관령, 99곡 대굴대굴 굴러 넘는 '대굴령' 횡계에 와서 박재삼 시집 『대관령 근처』를 읽는다. 장엄하게 해는 지고 일몰처럼 사라져버린 시인의 시집에는 스릇스릇 눈 쌓이는 소리가 들린다. 횡계의 첫 겨울. 옥수수도 다 베어지고 흙의 기억을 말끔히 털어낸 감자자루마저 이제 모두 서둘러 대처 길을 떠나버렸다. 버스가 들렀다 가는 정류장 근처에서 추어탕을 먹다가 돌아보니 불 지핀 연탄난로 곁으로 몇몇 겨울 저녁이 깃들어 곱은 손을 비빈다. 이제 어둠은 길어지고 광명은 보잘것없어 곧 무명을 덮는 큰눈이 펑펑 횡계에 오르라. 어쩌면 좋은가. 온다던 것들은 이미 모두 와 문 밖을 서성이는데 아직 가지 못한 길 위에서 대관령 칼바람이 씽씽 분대질을 친다. 아, 어디에다 또 하룻밤을 던져보나. 어디 가서 이 뭉글거리는 목숨의 멀미와 술기운을 달래 앉히나. 그예 어디로든 깃들어 가서 어두워진 한 하늘과 한 대지의 틈새를 비집고 또 시린 등 다독여야 한다고, 월정사 찾아가는 산모퉁이 벌써 목어가 온다. 언젠가 황망한 인연의 해협에서 목놓아 울던 그놈이 틀림없을 터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또 '나'와는 무슨 상관이겠는가. 기러기 날개처럼 철을 타는 저 언덕밑을 내 육신도 시방 흔들리며 내닫고 있건만 아, 세월 속을 흘러가고 있건만 [주: 박재삼 시 「대관령 근처」(『대관령 근처』, 정음사, 1985)의 한 구절] 풀의 바다를 헤엄쳐 황태 덕장으로 오대산에서 대관령으로 건너오는 백두대간의 길목은 황병산(1,407m)이다. 정선 땅 아우라지에서 조양강(朝陽江)[주:남한강 상류를 정선 지방에서는 '아침 햇살이 아름다운 강'이란 뜻으로 조양강(朝陽江)이라 부른다.]으로 흘러드는 송천이 이로부터 여울을 발원한다. 황병산 아래 송천이 시작되는 곳의 지명은 상정평(上政坪)이다. 옛날에 죄를 지은 세 정승이 숨어살았다는 전설을 위하여 마을 사람들이 삼정평(三政坪)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상정평에는 유명한 삼양목장이 있다. 언젠가 삼양목장 풀밭이 좋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진작부터 벼르던 터이므로 30리 흙먼지 길을 헤치고 찾아갔지만 막무가내로 문을 닫아건다.[주: 서울 본사로부터 미리 허락을 받아야만 출입이 가능하다.] 스물 안팎이던가, 초해(草海)라는 말을 즐겨 쓰던 때가 있었다. 풀바다. 누구에겐가 그런 이름을 지어주고 그녀와의 사랑을 꿈꾸던 때도 있었다. 잔뜩 부풀었던 마음을 버리고 올라갔던 산길을 내려오다 다시 만나는 지명이 삼정평(三井坪)이다. 세 갈래의 골물이 하나로 모여든다 하여 그런 이름을 얻었다는데 동네를 부를 적에는 그저 '이야지'[주: 지도에는 '의야지'로 되어 있다.]라고 부른다. 한때는 함경도에서 정감록을 품고 흘러온 사람들이 모여 살기도 했다 하고, 한때는 김춘삼이라는 사람이 넝마 무리를 이끌고 이곳의 산간을 일구며 살았다는 얘기도 남아 있다. 이야지 마을에서는 황태를 말리기 위해 덕을 거는 일이 한창이었다. 횡계의 특산품인 황태를 말리는 덕장은 이제 3만여평이나 되어 전국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는다. 멀리 베링해나 알래스카에서 잡혀온 동태가 주문진에서 내장을 빼어주고 다시 횡계로 와 하루 동안 맑고 시린 골물에 담겼다가 덕장에 걸린다. 그렇게 겨우내 눈보라 속에서 얼기와 녹기를 몇 번이고 거듭한 뒤라야 비로소 맛좋은 '노랑태'가 된다. 너무 추우면 희어지고 너무 더우면 검어지니 날씨 또한 애써 도와야 한다. 아무렴, 추위와 눈 속에 얼음 박힌 제 육신을 걸었으니 그 맛이 어찌 예사롭겠는가 황태여! 하늘 아래 첫 동네 '엇개' 이야지에서 여울을 따라 내려서면 도암 면소재지 횡계다. 횡계 또한 세 갈래의 여울이 모여들어 장차 남쪽 정선으로 아우라지 길을 떠나는 곳이다. 북쪽의 이야지 골물과 동쪽의 대관령 골물이 서로 만나고 서쪽으로 역시 황병산에서 흘러운 '거란재 9거래지, 車來地) 골물이 차항리(車項里)를 지나 흘러든다. 거란재는 고려 군사에게 쫓기던 거란의 병사들이 숨어들었다는 전설이 깃든 이름이지만 차항리는 일제시대 거란재와 '춘두항'의 지명을 섞어 생겼으니 그리 정갈한 이름은 못된다. 그렇듯 망르 앞에서 여러 냇물이 서로 엇걸린 꼴을 두고 예로부터 '엇개'라는 곰살가운 이름으로 부르는 곳이 바로 횡계다. 그 어여쁜 이름을 버려두고 굳이 발음도 어려운 횡계를 쓰는 것은 아무래도 슬픈 일이다. '청뚜루버덩,' '술바우', '가시머리'같은 엇개에서 오르는 대관령 고갯길에 걸린 망르 이름 또한 아주 근사하다. 청뚜루버덩은 그야말로 '하늘 아래 첫 동네'(天坪洞)란 말로 생겨난 지명이지만 이제는 길가에 조립식으로 지은 '가든' 이름에나 겨우 남아 있고 본래 마을은 거의 흔적을 잃었다. 옛말로 전해오기를, '청뚜루 거센 바람만 탈 없이 벗어나면 대관령 고갯길은 다 넘은 거'라 했다는데 아닌게아니라 칼바람이 모질다. 술바우에 있는 숲속의 대관령분교 역시 지난해 폐교의 운명을 맞았다. 대관령분교에서 가시머리로 오르는 길 저편 목장에는 야트막한 구릉마다 소떼가 한가롭게 마른풀을 뜯고 있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소를 본 적이 없으므로 길을 멈추고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소는 참으로 신비롭고 이상한 짐승이다. 어디든지 절집의 벽화마다 흔하게 보았던 탓만은 아니다. 세상 아예 급한 것이라곤 없는 그 여유 탓만도 아니다.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를 알아듣는 짐승, 느릿느릿 제 갈길을 알고 가는 짐승처럼 소는 아주 신통한 구석을 지녔다. 목장 언덕에서 풀을 뜯는 소떼를 바라보고 있자니 맑고 잔잔한 호수를 만난 것처럼 잠시 생각이 지워진다. 생명의 축제, 강릉단오제 가시머리에서 산굽이 하나를 돌아서면 이내 대관령 고갯마루다.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는 대관령 고갯마루는 널찍한 휴게소가 아래위로 자리잡아 늘 인파로 북적대는 곳이다. 본래 대령(大嶺)[『증보문헌비고』 「여지고」의 관방 편에, "지지(地誌)에 이르기를, '대관령은 강릉부 서쪽 40리에 있다. 산맥이 함경도의 검산(劍山)과 분수령에서부터 본도(本道)로 들어와서 철령, 추지령, 금강산이 되고, 또 금강산에서부터 미시파령, 설악산, 소동라령, 오대산을 거쳐 이 고개가 되는데 천여 리에 가로 뻗치었다. 『한지(漢志』에서 이른바 단단대령(單單大嶺)이라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러 고개는 모두 산등성이가 길이 열린 곳과 서로 이어졌는데 이 고개가 더욱 험준하여 그 높이가 30리나 된다. 옛날에는 관방(關防)을 두고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강릉의 여러 고을을 관동이라 칭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개 아래에서부터 산 허리로 구불구불 이어져 모두 50여 구비를 거쳐 관방에 도달한다'하여싸."고 실려 있다.]이라 하여 아흔아홉 구비[정확한 헤아림이 아니라 다만 옛날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말이다.]가 세상을 영동과 영서로 갈랐으니 굳이 쉼터가 아니어도 으레 쉬어감이 마땅한 곳 아닌가. 내륙과 해안이 서로 만나 발길을 멈추는 곳. 그곳에는 언제나 한 세상에서 또 다른 세상으로 띄우는 연정의 엽서 같은 흰구름이 두둥실 걸려 있다. 상행선 휴게소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서낭당 가는 길을 물었다. 모두들 외지에서 온 사람인 듯 휴게소 직원들도 좀처럼 아는 이가 없었는데 청소부 차림의 한 촌로가 공손하게 휴게소 뒤편을 가리킨다. 촌로가 일러준 허름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얼마쯤 올라가니 그제야 큼지막한 서낭당 푯돌이 눈에 띈다. 대관령국사성황사(大關嶺國師城隍祠) 푯돌의 뒷면에는 '강릉단오제'에서 세웠다고 적혀 있다. 해마다 봄날이면 무려 한달 보름이나 이어진다는 강릉단오제. 일찍이 강릉의 소설가 허균(1569~1618)은 "해마다 오월이면 대령의 신을 모셔다가 갖은 놀이로 기쁘게 해드린다"[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 藁)(옮긴이 주: 覆자는 '복'이라고도 읽고 '부'라도 읽으나 컴퓨터상에서는 부로 찾으니 없고 복으로 찾으니 그제서야 나온다.]고 단오제를 글로 남겼다. 강릉은 본래 무천이라는 제사를 지내던 동예의 땅이다. 무천이 시월 상달에 올리는 추수감사제라면 단오제는 모내기를 끝낸 뒤에 곡식의 파종과 성장을 기원하는 잔치다. 온갖 씨앗을 잉태한 대지의 신들에게 바치는 생명의 축제. 강릉단오제는 그 연원을 모를 정도로 내력이 오래 되었다고 한다. 제사의 쉰은 대관령의 국사서낭신(범일국사[신라의 고승으로 810년부터 889년까지 살았다. 15세에 중이 되어 당나라에 유학한 뒤 구산선문의 하나인 강릉 굴산사에서 40여년을 주석하며 사굴산파의 개조가 되었다. 처녀가 표주박에 담긴 해를 마시고 낳았다는 탄생설화, 왜구가 침략할 적마다 대관령에 올라 술법으로 물리치는 등 강릉 지방에는 그에 관한 많은 전설이 구전된다. 대관령국사성황사는 죽은 뒤에 강릉과 영동 지방의 수호신이 되었다는 범일국사를 서낭신으로 모신다.]과 산신(김유신[허균의 「성소부부고」에 "그는 어려서 이곳에 와 수련하였는데 산신이 검술을 가르쳤고, 그의 칼은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만들었는데 90일만에 완성되어 광채가 달빛을 능가했다. 장군이 그 칼을 차고 고구려를 평정했으며 죽어 대관령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강릉 시내에 있는 국사여서낭신(강릉의 처녀[옛날 강릉 남문동의 정씨 집안에 예쁜 딸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정씨의 꿈에 대관령 서낭신이 나타나 그 집의 사위가 되겠노라고 청했다. 그러나 정씨는 사람이 아닌 귀신을 사위로 삼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얼마 후 정씨의 딸은 대관령 서낭신의 시자인 호랑이에게 물려가고 말았다. 사람들이 서낭당에 가보니 정시의 딸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 대관령 여서낭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그녀가 호랑이에게 물려간 4월 15일이면 서낭신을 여서낭사에 모셔가 합위시키고 제사를 올렸다. 이 행사는 지금도 강릉단오제 기간중에 이루어진다.]이다. 음력 삼월 스무날이면 신주(神酒)를 빚는 일로 시작하여 단오가 지난 음력 오월 초이래까지 계속된다. 한편에선 왁자지껄 난장을 치고 단오굿과 풍어굿을 올린 뒤 관노가면극 같은 탈놀음도 곁들인다. 나그네의 속내를 캐묻는 대관령 서낭당 푯돌에서 서낭당까지는 꽤 멀었다. 두어 마장 비탈길에는 군데군데 울긋불긋 물색을 걸어 땅이라고 모두 다 같은 땅이 아님을 알린다. 백두대간을 거슬러 오르며 길이 점점 산마루에 가까워지면서 바람은 한층 더 매몰차다. 도산광풍(刀山狂風)이라 했던가. 험상한 사천왕이 절문을 가로막고 흘러온 내력을 다그치듯, 서낭당 들목을 지키는 대관령 칼바람이 함부로 살아온 범부의 옷깃을 헤집으며 자꾸만 속내를 캐묻는다. 뒤집어 딱히 내보일 것도 없는 속세 중생 쩔쩔매다 겨우 토한 한 마디, '허, 그 바람 참 장하구나!' 대관령국사성황사, 거긴 참으로 이상한 땅이었다. 웬만한 절간 하나쯤은 거뜬히 품고도 남을 만한 산자락에 아주 깊고 은밀한 세상의 내면처럼 깃들어 앉은 별당(別堂). 아니 세상 밖의 세상, 그러나 분명 세상의 한자락이 되어 저마다 색색의 형용을 갖춘 마음의 땅이었다. 널찍한 주차장을 지나니 이미 큰쇠소리 쟁쟁하고 어느 고즈넉한 절집의 당우(堂宇)처럼 아담한 서낭당과 산신당이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산신당 뒤편에 자리잡은 칠성당과 용왕당은 당집은 아니고 그저 촛불에 비바람이나 막을 양으로 지은 제단뿐이다. 사람도 반갑고 큰쇠소리 또한 반가워 부랴부랴 산비탈을 치달아 오르니 당집마다 굿판이 한창이다. 일년 열두 달, 거긴 언제나 굿판이란다. 저 낮고 평평한 사람들의 풍속까지 으레 정교(正敎)와 사교(邪敎)로 분별하는 이들의 눈에는 그저 영락없는 미신의 땅이다. 허나 그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소린가. 굿은 다만 인간의 미완성과 실수와 미안함을 실어다가 '삶'이라는 종교에게 바치는 화해의 잔치다. 사노라고 지은 죄 굳이 두남두어 무엇하랴마는, 그래도 속내에 맺힌 원통함을 풀고, 슬픔도 풀고, 미처 나누지 못했던 사랑과 용서의 말씀을 주고받는 해원의 놀음이다. 더러는 이미 죽어 추억만 남은 귀신들도 불러내고 우리 마음 안에 웅크린 허깨비도 끄집어내어 술도 마시고 춤도 춘다. 한 세월이 괴로웠으므로 또 한 세월이 즐거웠노라고, 미안하다고, 아니 그저 괜찮다고 , 아무렴, 그런 땅도 있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점점 사는 일이 더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네 삶에 맺힌 많은 것들을 좀처럼 풀지 못하는 까닭이다. 대관령에 뿌린 이별의 눈물 서낭당 굿판 구경에 또 하루해가 저무는 걸 잊었다. 하릴없이 굿판을 기웃거리는 잡놈이 자꾸 눈에 거슬리는지 인천에서 왔다는 중년의 박수 한 사람이 서낭당 뒤편을 가리키며 백두대간 날망을 타고 선자령(1,157m)으로 오르는 산길[오른편으로는 동해가 왼편으로는 광활하고 아름다운 목장의 목초지가 내려다보인다.]이 아주 좋다고 귀띔을 한다. 고맙지만 나도 안다고 웃으며 대꾸한 뒤에 산술 한 잔을 얻어 마시고 서낭당을 내려왔다. 상행선 휴게소에서 다시 구름다리를 건너가면 하행선 휴게소다. 하행선 휴게소에는 웅장한 '고속도로 준공기념비'가 서 있지만 그보다는 기념비 뒤편에서 내려다보는 강릉과 동해의 풍경이 아주 장관이다. 웬만큼 허튼 생각이라면 굳이 서낭당에 오를 일도 없기 거기쯤 어디 망망한 동해를 향해 털어내도 좋으리라. 사람들은 참으로 높은 곳에 오르는 걸 좋아하지만 정작 높은 곳이란 그저 낮은 데를 바라보기 위해 있는 것이란 걸 잘 모른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오직 높은 곳만 바라보는 이상한 짐승이 되었는지. 휴게소를 벗어나면 바로 강릉으로 떨어지는 구절양장 내리막길이다. 대간 동쪽으로 바다와 어우러진 해안의 땅을 향해 길은 그저 아흔아홉 구비를 한없이 흘러내린다. 저무는 해를 대간 너머에 두고 왔으니 산구비에는 벌써 땅거미가 내리는데 휴게소에서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길턱에 웬 첨탑이 하나 솟아 있다. 멈추어보니 뜻밖에도 신사임당(1512~1559)의 시비다. 언뜻 보기에는 나라 산천마다 수없이 걸린 전쟁의 승전기념탑을 닮았다.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 이렇게 드높은 첨탑을 지닌 시비는 없으리라. 한편에는 한시 칠언절구를 새기고 또 한편에는 한글을 새겼는데 서울길을 떠난 신씨가 어머니와의 이별을 슬퍼하는 내용이다. 대관령에 이별의 눈물을 흩뿌린 이가 어찌 신씨뿐이랴. 『마음도 쉬어가는 고개를 찾아서』-김하돈 글 중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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