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06. 12. 24, 날씨 맑음. 구간코스 삽당령 → 들미재 → 석두봉 → 화란봉 → 닭목재 → 고루포기산 → 횡계치 → 능경봉 → 대관령 산행거리 27.1 km 산행시간 07:55분 삽당령 출발, 17:58분 대관령 도착, 10시간 3분 소요 교통편 승용차로 삽당령에 도착, 삽당령 - 대관령 구간 산행을 마치고 대관령에서 택시(011-373-9622)로 횡계로 이동, 터미널에서 강릉행 버스 탑승(15분간격), 강릉시외버스터미널에서 19시 정각에 임계행 버스 탑승, 19:50분 대성장(033-562-0273) 투숙 1박, 25일 임계버스터미널에서 08:05분에 동해행 버스 탑승 후 08:25분 백봉령 하차, 산행시작, 삽당령 도착 후 차를 몰고 임계->정선->평창->방림->새말->영동고속도로 거처 21:50분에 집 도착으로 백두대간 23, 24구간 산행 종료. 24구간 들머리 삽답령 삽당령, 강릉시 왕산면 송현리와 강릉시를 잇는 35번 국도로 간이 휴계소가 있다. 송신탑에서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이정표 뒤 돌아본 석병산과 두리봉 들미재 내려서기 전 소나무..수 많은 등산객과 눈인사를 하며 오늘도 이렇게 묵묵이 서있네!! 들미재, 소나무 몇그루가 있어 쉬어가기 좋은곳.. 이 몸은 그냥 지나치네 석두봉(982 m) 석두봉에서 바라본 화란봉과 그 너머의 고루포기산 화란봉(1,069 m) 화란봉을 내려오며 전망대에서 바라본 고루포기산(우측) 닭목령,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와 왕산리를 잇는 137번 지방도 닭목령의 등산 안내도 맹덕 한우목장에서 뒤 돌아 조망한 화란봉과 대간 마루금 맹덕 한우목장에서 조망한 고루포기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해 고루포기 정상 부위는 희미하게 조망된다. 생김새가 비슷해서 한컷 왕산제1쉼터 고루포기를 향하여.. 고루포기산(1,238 m) 고루포기를 내려서며 조망한 능경봉 횡계 제1쉼터의 이정표 능경봉(1,123 m) 능경봉의 등산 안내도 능경봉에서 조망한 대관령 뒤 돌아본 능경봉 능경봉 등산 안내도 24구간 날머리 대관령 영동고속도로 준공기념비 대관령 개척의 선구자, 고형산 강릉과 주문진 사이의 작은 해안마을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강릉 시내에 있다는 대관령 국사여서낭당을 찾아갔다. 그러나 본래 강릉 남문동에 살던 정씨 집안의 처녀가 범에게 물려가 국사여서낭이 되었다는, 그 서낭당 여신은 끝내 곱살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전설만 추려도 얼추 책 한 권은 될 법한 대관령 호환 이야기, 외경의 자연 앞에는 으레 처녀를 바치던 옛날의 풍습, 신격과 인격의 성적(性的) 결합 같은 질서 없는 생각들을 추스리며 주변의 관공서를 몇 군데 돌아다녔다. 강릉문화원에서 얻은 '명주군 지명'과 강릉시청 공보담당관실에서 건네준 '강릉관광소개자료'는 약간씩 도움이 되었다. 강릉대 교수 장정룡이 쓴 『대관령문화사』(동해안발전연구회, 1996)는 대관령의 역사와 개척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한 책이다. 그의 글에 따르면, '중종 6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고형산(高荊山 1453~1528)이 민력을 동원하지 않고 몇 달만에 대관령을 개척하여 병자호란 때 주문진으로 상륙한 청군이 이 길로 한양을 쉽게 침범하였으므로 인조가 대노하여 고형산의 묘를 파고 이른바 부관참시했다'는 종래의 전설은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고형산은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축출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훗날 그의 부관참시는 어찌 되었든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 뿌리를 둔 사건일 뿐, 대관령 개척과는 무관하다는 이야기다. 병자호란의 공간적 배경과 대관령 역시 거리가 너무 멀고, 교통이 어려웠던 시절에 도로를 개척한 공로를 일관되게 부정적 측면으로 폄하한 이유 또한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고 했다. 어찌 되었든, 고형산이 대관령 개척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뚜렷한 사실로 보인다. 장정룡의 글은, 고형산을 대관령 개척으로 동서 교류의 새 역사를 이룩한 인물로 결론짓는다. 제민원은 간 곳 없고... 강릉에서 대관령 고갯마루는 50리길이다. 그 길 절반 턱에 구산(邱山)이란 지명이 하나 있다. 본래는 공자가 이름을 따온 이구산(尼丘山)을 닮아 구산(丘山)이라 하던 것을 성현의 이름을 함부로 쓴다 하여 그렇게 바꾸었다는 곳이다. 옛날의 구산에는 구산역(邱山驛, 횡계역에서 대관령을 넘어 강릉과 우계를 연결하는 역)이 있었고, 지금은 국도와 고속도로를 함께 쓰는 대관령 길목에 구산휴게소를 지어 쉼터를 제공한다. 휴게소 맞은편에는 일명 '마패 서낭'[옛날, 횡경의 삼정평에 이괴산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꾀하며 숨어살았다. 나라에서는 이괴산의 역모를 평정하기 위하여 암행어사를 내려 보냈는데 염탐을 위해 삼정평에 들어갔던 어사가 그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꼼짝없이 죽을 지경에 처한 어사는 한 아낙에게 마패를 꺼내주면서 구산역의 찰방에게 군사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부탁했다. 아낙은 밤새 산길을 달려 구산역에 이르자 그만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죽었다. 죽은 아낙의 품에서 마패와 편지를 발견한 역졸들은 삼정평으로 달려가 어사를 구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구산 서낭당을 마패 서낭이라 부르게 되었다.]이란 전설을 품은 구산 서낭당이 건너다보인다. 고갯길이 시작되는 구산을 떠나 산구비 하나를 돌아서면 금세 고인돌 모양으로 지었다는 '대관령 박물관'이다. 경북 문경의 '새재박물관'이 떠올라 반갑게 들어가보니 홍귀숙이라는 사람이 평생 수집한 문화재를 전시했다는 사설박물관인데 별 볼거리도 없이 입장료는 무려 2천5백원을 받는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대관령 고갯길과 관련된 역사와 문화, 혹은 대관령과 관련된 지방에 대한 이해를 돕는 학술적 배려는 찾을 길이 없다. 문을 나오다가 다시 대관령 박물관이라는 문패를 보니 속았다는 느낌을 감출 길이 없다. 박물관이 선 자리는 유서 깊은 제민원(濟民院)이 있던 곳이다. 또한 아직 번듯하게 남아 있는 대관령 옛 오솔길이 시작되는 들머리다. 제민원에서 하룻밤을 묵은 나그네가 험준한 대관령을 넘기 위해 다시 미투리 끈을 단단히 고쳐 매던 곳. 그 옛길이 암 아름답다 하여 좀 걸어볼 참인데 마침 산불이 잦은 철이라며 감시원이 길을 막는다.[봄가을로 산불은 잦은 철에는 오솔길 산행이 통제된다.] 별 수 없이 발길을 돌리는데 박물관 뒤편으로 예사롭지 않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널찍한 빈터가 보인다. 원(院)터라면 몇 번 본 적이 있어 산불감시원에게 혹시 제민원 터가 아니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웬지 미심쩍어 틀림없느냐고 또 물으니까 '아마도 그럴 거'라며 멋쩍게 웃는다. 공연히 묻는 일이 더 미안하여 '아니면 그만이죠 뭐' 하면서 나도 웃었다. 발목까지 낙엽이 덮이는 옛길 하도 험하여 대굴대굴 굴러 넘는다는 고개, 이름하여 대굴령이다. 대관령 근처에 사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은 지금도 하나같이 대관령을 대굴령이라 부른다. 나그네가 아무리 또박또박 대관령이라 불러도 그들은 꼬박꼬박 대굴령이다. 강릉의 향토연구가들은 더러 인근에 터가 남아있는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 굴산사( 山寺)에서 그 뿌리를 찾는 이도 있다. 분명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대관령은 참으로 넘기 힘든 고개라는 사실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 고갯길은 험로 중의 험로이다. 게다가 여름이면 꼬리를 무는 피서 인파로 길이 막히고, 겨울이면 엄청난 폭설이 아예 길을 끊는다. 제민원 들목의 '굴면이'도 대굴령 이야기에 한몫을 보태는 지명이다. 대굴대굴 구르는 것을 면(免)하는 곳이란 얘기다. 굴면이에서 대굴령을 거슬러 오르기를 수십 구비, 길 건너편으로 '대관령 옛길'이라는 푯돌이 서 있는 곳이 '반젱이(半程)'이다. 옛길로 횡계역에서 구산역에 이르는 중간 지점이라는 듯으로 생긴 이름이다. 길섶 빈터에 차를 세우고 건너편으로 무단횡단을 감행하고 보니 마침 차를 세워둔 곳이 옛날 주막이 있던 자리란다. 반젱이에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산불감시원이 두 분이나 턱 바티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 오솔길을 좀 걸어볼 궁리로 우선 옛이야기부터 먼저 물었더니 주막 이야길 들려준다. 불과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그림 같은 초가 주막이 그곳에 있었단다. 담배를 권하고, 농담이 오가고, 웃음이 터지는 기회를 틈타 슬쩍 속내를 털어놓았더니 뜻밖에도 선뜻 길을 열어주는 우리들의 고마운 산불감시원! 대신 이름과 주소를 쓰라는데 까짓 열 번인들 못 적어주랴. 행여 노인들의 마음이 바뀔세라 얼른 산비탈을 치달아 내리니 아, 그 옛길 참으로 좋다. 마치 거대한 왕릉을 옹기종기 이어놓고 그 틈새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듯 서너 걸음 지나면 다시 돌고, 돌아 서너 걸음이면 다시 모퉁이다. 길은 마땅히 한 치 앞도 미리 볼 수 없는 터라 열 사람이 길을 가도 예닐곱이 안 보이는 희한한 길이다. 길이 그러하니 달리 갈 곳이 없기로는 낙엽도 마찬가지여서 오로지 오목한 길 복판에 쌓인 낙엽이 발목을 덮는다. 한 번 걸어보라. 감히 어느 누가 세상에 길 없다 하겠는가. 아름다운 길, 아름다운 사람들 마음을 풀어놓고 한 스무 구비는 걸었으리. 그 길 끝이 비록 어디 닿는 바 없다 해도 한 사나흘쯤 그렇게 내처 걸었으면 좋겠네. 가다보면 저만치 등짐 나귀 앞세운 보부상도 스치고, 올해도 과거는 영 글렀는지 잔뜩 풀이 죽은 한량도 만나겠지. 권세 양반 행차라면 짐짓 슬쩍 비켜도 주고, 운이 좋아 서낭당 치성 가는 처자라도 만나면 짓궂은 수작이나 부려 보겠네. 그도 저도 싫증나면 마른 낙엽 베고 누워 오가는 행장 구경이나 하지. 오솔길에 풀어놓은 마음이 그렇듯 온통 부챗살을 펴는 사이, 강릉 시청의 한 직원이 가르쳐준 비석 찾는 일을 잊고 있었다. 기관(記官) 이병화(李秉華) 강릉의 향토지 『증보임영지)(增補臨瀛誌)에는 "어질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으로 대관령 30리 어름에 길이 험하여 사람이 살지 않으나 왕래가 빈번하고 겨울이면 얼어죽는 사람이 많아 늘 걱정하다가 백금(百金)의 돈을 내어 반정에다 주막을 열었다. 오가는 이들이 쉬고 묵어가니 비석을 세워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라고 그에 대해 적고 있다. 비석을 찾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부러 대관령 오가는 이들 보라고 세운 비석이었으니 오솔길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길가 어느 무덤 앞에 서 있었다. 몸돌도 그저 예삿돌을 세우고 글꼴 역시 단촐하여 언뜻 보기에도 품격을 따진 비석은 아니다. 다만 비석 둘레로 아담하게 쌓은 해묵은 돌담에는 차곡차곡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앞면에는 임영지와 비슷한 내용을 새기고 뒷면에는 도광(道光) 4년에 세웠다고 했으니 1824년의 일이다. 기관이면 기껏 말단 이속(吏屬)인 것을, 백 꿰미(百緡)의 돈을 내어 이만한 이야기를 남긴 그도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길이 그만하다면 사람 또한 으레 그만큼은 되는 법. 자꾸만 그 돈의 출처에 미련이 남는 것은 이즈음을 살아가며 앓는 나그네의 질병이다. 『마음도 쉬어가는 고개를 찾아서』-김하돈 글 중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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