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적들에 의해 내가 내던져지더라도, 그 적들이 미국이나 다른 누구라 할지라도, 그들은 이 나라의 발전을 다만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을 뿐이다.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칠레의 멸망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대통령을 죽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한 사람의 개인일 뿐이다. 당신이 자유로운 칠레를 죽이려 한다면 당신은 모든 젊은이들을 죽여야만 할 것이다.” 1972년 스웨덴 교통통상장관 벵헷 놀링에게 아옌데는 말했다. 그리고 이듬해 대통령 아옌데는 모네다궁에서 미국의 사주를 받고 진격해오는 반군을 향해 소총을 들고 혼자 싸우다가 사망했다. 아옌데가 죽은 후 칠레는 긴 세월동안 납치, 고문, 암살, 처형을 자행한 피노체트 군부 독재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강조하듯이 아옌데는 실패한 지도자가 분명하다. 그러나 42년이 지난 지금 칠레인들은 아옌데를 다시금 기억한다. 피노체트 실각 후 아옌데의 무덤에는 헌화들이 그칠 줄 모르고 사람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역사는 실패자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이 진실임에도 칠레인들, 아니 자유를 갈망하는 온 세계 사람들은 왜 아옌데를 잊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강대국의 침탈에서 조국 칠레를 지키려했던 지도자, 어두움 속에 신음하는 자와 굶주린 아이들과 병든 자들을 지키려했던 지도자의 진실을 사람들이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대함은 그곳에서 다시금 빛을 발한다. 그것은 또한 그러한 지도자가 다시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의 염원을 증거 한다. 그가 믿었듯이, 칠레의 모든 젊은이들이 죽지 않는 한 칠레는 다시 부활할 것이다. 평범한 개업 의사의 길을 가는 것으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던 또 한 사람의 의사가 자신을 불사르다 간 험난한 행로를 되돌아보는 것은, 우리가 그에게 보낼 수 있는 최소한의 존경의 표시일 뿐이다.
2. 출생과 정치 입문
1908년 7월 26일 살바도르 아옌데 고센은 칠레의 발파라이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9세기부터 이름난 정치적 활동가의 집안으로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 중상류층 가정이었다. 그는 14살 때 구두 수선공이며 무정부주의자였던 후안 데르마치와 친해졌고 그를 통해 아나키스트의 대부로 알려진 바쿠닌을 알게 된다. 이후 군에 자원입대하여 카발리 부대의 장교를 지낸 후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의과대학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뚜렷한 자료들은 보이지 않지만 자료에도 있듯이, ‘그는 빈민들의 질병을 통해 빈곤층의 불행과 사회의 모순을 보았고, 민중들의 육신보다 그들의 정신을 먼저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막시즘 정치활동에 참가한 그는 학생회장에 당선되고 반정부 활동으로 두 번 투옥된다. 수감 중 아버지의 임종을 맞아 가출옥한 그는 시신 앞에서 사회투쟁에 헌신할 것을 맹세한다. 그는 의과대학에서 퇴학당했다가 25살인 1933년에 졸업한다. 의대를 졸업하기 전인 1932년에 그는 사회당에 참여하고 그 후 치과대학 조교, 검시관 조수, 정신병원 의사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 고향에서 개인의원을 개업하기도 한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1933년부터 칠레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에서 눈에 띠기 시작한 아옌데는 1937년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첫 발을 내디딘다. 이 시기에 사회복지, 여성운동, 공중보건 같은 다양한 이슈를 다루었던 그는 1938년부터 42년까지 보건장관을 지내며 질병의 사회적 원인들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부터 1970년까지 네 차례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의장과 부의장을 지냈고, 1952년, 1958년, 1964년 연이어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다. 그러나 1970년 선거에서 파블로 네루다의 공산당 대통령 후보 반려 등 진보진영의 후보 단일화와 진보정당들의 연합체인 ‘인민연합’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고 36.6%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아옌데와 네루다와의 우정은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다).
3. 칠레인의 길
그의 당선은 세계 최초로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 출범이었다. 그 무렵 스페인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칠레는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처럼 극심한 빈부격차와 계급간, 좌우파간 갈등이 극심한 상황이었다. 또한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부터 왜곡되기 시작한 경제구조는 미국과 기득권 세력의 이윤추구를 통해 더욱 왜곡되어 일명 '바나나공화국이란 별명으로 불리웠다. (바나나공화국이란 산업구조가 바나나 같은 특정 작물이나 일차자원에 의존하고 있어 그 자원들의 작황이나 국제시장에서 시세에 따라 사회 경제가 좌우되는 구조의 국가를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대통령 후보 공약사항으로 모든 천연자원의 국유화, 어린이들에게 우유 무료급식, 의료혜택과 교육 무상 공급, 독자적 외교정책 채택 등 40개 조항을 내걸었다. 당선된 아옌데는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하는 동시 전통적 민주주의 제도를 유지했다. 그의 정책은 빈곤층의 상황을 개선시키고 칠레 경제에서 민간회사 특히 외국회사의 역할을 감소시키는데 집중 되었다.그는 이러한 노선을 일컬어, 소련이나 쿠바 같은 폭력 혁명이 아니라 평화적 선거와 입법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로 가는 ‘칠레인의 길’이라 했다. 그는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영세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석탄, 철강, 구리회사를 국영화했다(입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동광(銅鑛)회사의 국영화는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또한 물가동결, 임금인상, 우유보급과 아동의료와 교육을 현실화 했다. 이러한 개혁은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지만 중상류층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반면, 노조, 영세농민, 사회주의자들은아엔데에게 더 많은 개혁을 요구했다.
근소한 표 차이로 취임한 아옌데는 칠레 대중으로부터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는데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노암 춈스키에 따르면, 미국은 이 선거과정과 그 전후에도 아옌데를 방해했다. 친미적 후보에게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하고 칠레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소련으로 보낸다는 등의 흑색선전을 했다. 당시 국제정세로 볼 때 아옌데 정권의 출범은 곧 소련과 쿠바가 중남미 정복을 시작한 징후로 미국에게 인식되었다. 아옌데의 당선이 확정된 며칠 후 닉슨은 키신저와 CIA의 리쳐드 헬름스를 불렀다. 헬름스는 말했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soft line으로 경제 압력을 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hard line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다.”라고(Secrets, Lies and Democracy―Interviews with Noam Chomsky, 1994, David Barsamian). 당시 미국의 움직임은 수년 전 공개된 미국 CIA문서에도 상세히 나타나 있다(중앙일보 2000. 09. 21,워싱턴-연합 2000.11.14.) 닉슨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칠레의 주요 수출품이었던 구리시장을 교란하기 위해 미국 이 비축하고 있던 구리를 국제시장에 내놓았고 구리 가격은 15.7% 하락했다. 또한 칠레에 대한 투자를 억제하고, 국제구제금융(IMF)의 지원을 차단하고, 칠레 내 아옌데 반대자들에게 1,000만달러를 지원했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천명한 당시 육군참모총장 레네 슈네이데르나 외무장관 올란도 레텔리에 같은 지도층 인사들의 납치와 암살을 도왔으며, 칠레에 수출되어야 할 각종 산업장비, 의약품 등 중요 기간물자의 수출을 중지시켰다. 그 결과 1973년 상반기에만 300%에 이르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맞고 식량과 생필품이 부족해지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기득권을 빼앗기게 된 자본가들이 유도 파업을 일으키는 등 전국적으로 자본가 지주 등에 의한 사보타주가 일어났다. 야당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으며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폭동과 소요가 증가하고 사회는 극좌와 극우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런 가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통령이 된 첫해에 빈민들의 상황은 나아졌다. 아이들은 우유 급식으로 배를 채웠고, 학교와 교실이 증축되어 교육을 받았다. 아옌데는 아이들의 교육에 관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아이들만이 특권을 가져야 하고 아이들만이 칠레의 희망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이들이 아침과 점심을 먹을 수 있기를 바랐고 그렇게 했다. 의사로서 먹지 못하는 아이들의 능력이 얼마나 떨어지고 그것은 곧 미래 칠레의 퇴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들에 대해 그가 강조할 때 그는 칠레의 밝은 미래를 꿈꾸었다. 그는 그가 추진한 모든 개혁을 통해서 못 먹고 고통 받는 아이들이 쑥쑥 자라나 칠레의 미래를 짊어져주기를 염원했다. 칠레의 기층 민중들은 그러한 아옌데를 믿었고, 1973년 3월 의회선거에서 아옌데의 인민연합은 과반수가 넘는 지지를 확보했다.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아옌데의 개혁은 추진력을 얻었고,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하기 전에 국민들로부터 재신임을 묻는 투표를 실시하려고 했다. 바로 그 투표를 하려던 날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혼란스런 과정 뒤에 미국이 가장 적극적으로 버티고 있었음은 기정사실이다. 이 시대의 양심이라 불리우는 노암 춈스키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닉슨이 사망했을 때 헨리 키신저는 송사에서 말했다. ‘세계는 리쳐드 닉슨 덕분에 더 좋은 곳, 더 안전한 곳이 되었다.’ 그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신문이 떠들어댔던 칠레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그리고 그곳이 얼마나 더 좋고 안전해졌는지를 보자” 춈스키는 칠레를 위해 칠레의 민중이 선택한 아옌데를 제거한 것이 미국이라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확신한다.
4. 칠레 만세―1973. 9. 11. 산티아고
칠레 산티아고의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시민들은 아침부터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20세기 최대의 서정시인 파블로 네루다도, 손목이 잘려 죽은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와 아내 조안 하라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라디오 방송에서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음을 알았다. 오래전부터 반란의 공기가 감지되고 있었고 며칠 전에는 불발 쿠데타가 진압되기도 했다. 허망하게도 그 불발 쿠데타를 진압한 지휘자는 그 운명의 날 쿠데타의 주모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였다. 9월 10일 밤 칠레 해군과 미 전함들은 발파라이소에 집결해 있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칠레 육, 해, 공군과 경찰은 군사평의회를 구성하고 의장에 피노체트 육군 최고사령관을 선출했다. 군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아옌데는 국방장관의 보고를 확인한 후 7시 30분 19명의 경호원과 함께 모네다 궁에 들어갔다. 쿠데타군은 여러 방송국들을 점령해나가기 시작했고, 대통령은 점령당하지 않은 유일한 국영방송 마가야네스 라디오와 전화를 연결하여 마지막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은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마지막이 말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이제 박해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려는 것은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이란 점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목숨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조국의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방송 직후 대통령궁은 완전 포위되었고, 공중에는 칠레 공군 전폭기들이 선회 비행을 하고 있었다. 피노체트는 대통령에게 망명을 종용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아옌데는 거부했다. 오전 10시 40분, 아옌데는 경호대에게 대통령궁을 떠날 것을 명령했고, 대통령의 두 딸을 포함해 대부분의 여성들이 대통령궁을 빠져나갔다. 정오가 되자 쿠데타군 전폭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지상군도 탱크를 앞세워 진격했다. 쿠데타군이 모네다 궁에 진입한 얼마 후 몇 발의 총성이 들렸다. 모네다궁 공격을 지휘한 쿠데타군 팔라시오스 장군은 군사평의회에 짤막한 전문을 보냈다. "임무 완수. 모네다 접수, 대통령 사망" 피노체트가 모네다를 접수한 이후 일주일간 3만여 명이 학살되었다. 군부는 사회주의자들이나 그 동조자들, 진보진영 인사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색출하여 체육관에 몰아넣고 집단 처형했다. 그 후로도 당시 1,000만 명이던 칠레 인구 간운데 사망자 3천여 명, 실종 1천여 명, 고문 불구자 10만 명, 국외 추방자들이 100만 여명에 이르렀다.피노체트는 미국과 주변 라틴아메리카 독재자들과 공모하여 반체제 인사, 진보진영 인사들을 납치, 구금, 살해, 암매장하는 ‘콘도르 작전’을 수행했다. 지난 73년부터 83년까지 군사통치 기간 중 400여 명의 스페인인과 군사 정권을 비판하던 수많은 유럽인들도 이 악명 높은 작전으로 희생됐다. “나뭇잎 하나도 내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못한다”던 피노체트의 만행은 지속됐다.
5. 그를 기리며
조국을 자주국가로 세워 모든 민중이 풍요한 삶을 누리도록 하려는 아옌데의 원대한 꿈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의 소망대로 칠레는 다시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그는 패배했지만 역사 속의 영원한 승리자로 기억될 것임을 우리는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통탄스럽게도, 위대한 영혼들을 사악함의 제물로 바치는 어리석음을 인간들은 언제까지 지속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