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티아고(Santiago)
칠레의 수도이며, 이 나라의 정치, 산업, 문화, 관광을 대표하는 거대 도시이다. 칠레의 중부에 위치하며, 태평양 연안의 외항인 발파라이소에서 동남쪽으로 112㎞내륙에 있다.
안데스 산맥과 해안 산맥으로 둘러싸인 넓고 평탄한 분지에 자리 잡아 도시 건립에 유리하였기에, 일찍이 스페인의 식민 도시로 세워졌으며, 식민 시대와 독립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 나라의 수도였다.
산티아고는 1541년 스페인 정복자 페드로 데 발디비아(Pedro de Valdivia)에 의해 건설되었다. 발디비아는 도시 이름을 새로운 엑스트레마두라의 산티아고라는 뜻의 ‘산티아고데누에바엑스트레마두라(Santiago de Nueva Extremadura)’라고 지었다. ‘산티아고’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성인을 가리킨다. ‘엑스트레마두라’는 스페인의 지명으로, 발비디아가 태어난 곳이다.
발디비아는 산티아고의 쾌적한 기후, 풍부한 식생을 고려하여 이 지역에 도시를 설립하였다. 특히 산티아고 시내를 흐르는 마포초(Mapocho) 강이 두 개의 지류로 갈라져 흘렀다가 다시 합쳐지며 형성한 하중도라는 지형적 특성이 방어에 유리할 것으로 보았다.
발디비아는 산티아고 건립 초기부터 당시 원주민인 피군체(Picunche) 부족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1541년 9월 11일 피쿤체 부족의 추장 미치말롱코(Michimalonco)가 산티아고를 공격하기 시작한 이래로 약 3년에 걸친 긴 전쟁이 지속되었다. 당시 산티아고를 지키던 스페인 군은 외부로부터 식량 공급이 차단되어 아사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발디비아가 알론소 데 몬로이(Alonso de Monroy)를 특사로 보내 페루의 지원을 받는데 성공하였고,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국 전세가 역전되어 원주민은 남쪽으로 도주했고, 이로써 1817년 칠레가 독립하기 전까지 약 300여 년의 긴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티아고의 역사 (세계지명사전 중남미편: 인문지명, (주)푸른길)
남미여행 5일째(2015. 1. 16)
오늘은 페루 리마에서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로 이동 후
중앙시장, 아르마스광장, 모네다 궁을 둘러보는 관광 일정이다.
배경음악은 누에바 깐시온 노래로 비올레따 빠라가 작곡하고
인티 이이마니가 부른 어린 천사 린를 위한 추모곡 'Rin del Angelito' 이다.
'누에바 깐시온'은 칠레를 중심으로 1960년대에 남미에서 일어난 '새노래 운동' 이라 부르며 후반부에서 살펴본다.
♪ Rin del Angelito - Inti Illimani
페루 리마 공항에서 LAN 항공 LA 531편으로 08시 35분 출발한다.
산티아고까지 4시간 30분이 소요되니 14시 05분에 도착예정이다.
산티아고 국제공항 인근의 들판 모습
산티아고 국제공항의 내부 모습
이번 여행의 하일라이트인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의 사진이 걸려 있다.
옥빛 호수와 어우러진 저 곳을 4일간의 일정으로 트레킹 한다.. 음 벌써 가슴이 쿵쾅 거린디.
코모도로 아르투로 메리노 베니테스 국제공항[Comodoro Arturo Merino Benítez International Airport]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국제공항. 약어는 AMBIA이다. ‘파다우엘공항’ 또는 ‘산티아고 국제공항’이라고도 한다.
칠레에서 가장 큰 공항으로, 산티아고의 파다우엘(Pudahuel)에 있다. 1961~1967년 동안 건설하여 파다우엘공항으로 개항하였다.
1970년대에 칠레 공군의 창설자인 아르투로 메리노 베니테스를 기리기 위해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산티아고 국제공항 인근 시내 외곽의 모습이다.
중앙 시장(Mercad Central)
1872년 개장하여 해산물, 생선, 야채, 과일을 판매하는 시장으로 칠레 서민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중앙시장 내에서 해산물 요리전문점인 Donde August 등이 있어 계절에 따라 성게(erizo), 전복(loco),
붕장어(congrio), 조개삿갓(picoroco), 게(jaiva), 해물수프 등을 맛볼 수 있다.
산티아고 국제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걸려 이곳 중앙 시장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14시 30분에 시장 입구에 위치한 엘 갈리온(El Galeón)식당으로 들어 간다.
훤히 보이는 주방과 깔끔한 실내 공간
점심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실내는 텅 비어 있었다.
뭘 먹을까 각자들 메뉴판을 열심히 들여다 본다.
이번 여행의 특징 중 하나는 미리 예약한 식당이 없다.
현지의 명성과 현지가이드 추천으로 즉석에서 정한다.
때론 메뉴 고르는 불편함과 식사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각 지역의 대표적인 음식을 골고루 먹어볼수 있는 기회였다.
조개위에 치즈를 올려 오븐에 구워낸 마차스 파르메사나(Machas Parmesanas)
연어, 새우, 작은 굴, 전복, 조갯살 등의 해산물과 잘게 다진 채소,
양파와 함께 버무려 먹는 칠레의 대표 음식 하르딘 데 마리스코(Jardin de Mariscos)
맥주 한잔이 빠질수는 없지요 !
대체로 남미의 맥주는우리것에 비해 훨씬 맛이 좋다.
연어 페사카도스(Salmon Pesacados)
현지 가이드는 해산물 대신 돼지고기에 계란 프라이를 올린 로모 아 라 포블레(Lomo a la Poble)를 주문했다.
이유인즉 해산물 요리를 자주 먹어 질렸다고 했다. 그만큼 페루 및 칠레는 태평양 연안에 위치해 있어 수산물이 풍부하다.
식사를 마치고 시장 안으로 들어가 한바퀴 돌고 나온다.
중앙시장 광장에서 현지인들과 한장
이제 이곳 중앙시장에서 아래 지도의 분홍색 루트를 따라 걸어서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으로 이동한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아르마스 광장 주변의 아우마다(Ahumada)거리의 모습이다.
이곳은 한국의 명동 거리와 비견되는 상업이 발달된 거리로 주말이면 수만은 젊은이들이 모여 든다.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에 도착하니 대성당 건물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기웃 거렸더니 하늘색 상위를 입은 머리긴 사람이
대뜸 나를 보고 꼬레아를 외친다. 마추었다는 뜻으로 손으로 원형의 표시를 해주니 씨익 웃어댄다.
☐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 Santiago, Chile)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은 산티아고의 건설과 관계 깊은 상징적인 장소이다. 이 격자무늬의 정사각형 광장의 설계는 1541년 페데로 데 발디비아(Pedro de Valdivia)가 임명한 페드로 데 감보아(Pedro de Gamboa)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아르마스 광장은 역사적 명소인 산티아고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 de Santiago), 산티아고 중앙우체국(Correo Central de Santiago), 산티아고 최고법원이었던 칠레 국립 역사박물관(Museo Histórico Nacional), 라모네다 궁(Palacio de La Moneda), 산티아고의 관공서, 옛 시의회 건물 등으로 에워싸여 있다.
아르마스 광장은 산티아고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광장 내부에는 유럽식 카페가 분포하고, 다양한 길거리 공연이 열려 연중 시민들과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만남의 장소이다. 광장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건축물은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두 개의 첨탑이 인상적이며 독특한 유럽 양식으로 건축된 것이 특징이다.
산티아고 대성당은 아르마스 광장의 서쪽에 위치하며, 산티아고 대주교좌 성당이자, 산티아고 대교구의 중심이다. 성당 내부의 천장에는 아름다운 유럽식 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마치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이 성당은 다른 나라의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건축물의 위엄을 자랑하지만, 1558년 건립 당시부터 지진과 화재가 빈발하여 소실과 복구가 반복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성당은 1748년에 착공하여 1800년에 완공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티아고의 주요 관광 자원 (세계지명사전 중남미편: 인문지명, (주)푸른길)
1580년 산티아고 시가지의 모습이 새겨진 동판이
아르마스 광장 바닥에 놓여져 있다. 1646년, 1712년의 모습을 새긴 동판도 있다.
페드로 데 발디비아(Pedro de Vardivia, 1498-1554)의 동상
1541년 거센 원주민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이 도시를 건설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1554년 원주민 출신 알론소 아우따라(Alonso Lautaro)에게 생포되어 죽임을 당하는 인물이다.
노란색 건물은 국립 역사박물관, 발디비아 동상 우측 건물이 산티아고 시청사다.
우측의 국립 역사박물관, 좌측의 높은 빌딩이
문디알레스 국제항공운송서비스(Panalpina Chile Transportes Mundiales) 건물이다.
산티아고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 de Santiago)
1541년에 짓기 시작해 1558년 완공, 화재와 지진으로 무너져 1748년 복구를 시작해 1800년에 완공으로 현재의 모습이다.
이탈리아의 건축가 호아킨 토에스카가 설계했으며 바로크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지진에 대비하가 위해 건물 외벽의 두께는 1m가 넘는다고 한다.
좌측의 중앙우체국(Correo Central) 건물은
스페인 총통의 관저로 세워졌으나, 대통령 집무실이 라 모네다 궁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대통령 관저로도 사용되었으며 19세기 후반부터 중앙우체국 청사로 현재까지 사용되어 오고 있다.
대성당과 문디알레스 국제항공운송서비스(Panalpina Chile Transportes Mundiales)빌딩
아르마스 광장의 노천 카페
알론소 라우따로(Alonso Lautaro)를 형상화한 조각품
칠레 북부 출신으로 어렸을 때 발디비아의 심복으로 들어가 함께 생활하다
1550년에 도망나와 아라우칸 부족들과 함께 발디비아 군에 저항하였으며
1554년 발디비아를 생포하여 처형한 인물로 1557년 스페인 군대에 잡혀 사망한 인물이다. 발디비아 동상과 대각선 위치에 세워져 있다.
날씨가 더워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렀다.
좀 쉬려고 광장내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가던중
산책나온 가족의 막내가 아이스크림을 무척 먹고 싶어하는 표정으로 바라다 본다.
아이스크림이 조금 남아 있긴 했지만 먹던것이라 주기는 그렇코 해서 가지고 있던 껌을 주었다.
그 꼬마는 이내 어머니 품으로 달려가 우리의 존재를 알린다.
이런 인연으로 얻어진 한장의 사진이다. 참 보기 좋은 광경이다.
아르마스 광장을 둘러보고
아우마다(Ahumada)거리를 지나
금융 중심가 누에바 요크(Nva York)거리를 지난다.
누에바 요크(Nva York)거리에 위치한
Edificio Bolsa de Comercio de Santiago
칠레 증권 거래소(Stock Exchange) 건물이다.
누에바 요크 거리를 지나와 대통령 궁이 있는 헌법광장으로 들어 선다.
☐ 라 모네다 궁(Palacio de La Moneda)
라 모네다 궁은 칠레 대통령의 집무실 및 거주지로서 산티아고 도심의 중앙에 위치한다. 이 건물은 이탈리아 건축가인 호아킨 토에스카(Joaquín Toesca)에 의해 1784년에 착공되어 1805년에 완공되었다. 이 궁전은 본래 스페인어로 화폐를 뜻하는 모네다(Moneda)의 의미대로 조폐국으로 사용되다가, 1845년 6월 마누엘 불네스(Manuel Bulnes) 행정부 시기부터 대통령 관저 및 정부 부처로 사용되고 있다. 라모네다 궁은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대통령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의 쿠데타 세력에 맞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1973년 9월 11일 공군의 폭격으로 전사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2004년, 라모네다 궁의 남쪽에 시민 광장(Plaza de la Ciudadanía)이 설립되어 시민들과 관광객에게 만남과 여가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2010년 칠레의 독립 기념행사가 거행되었다. 이 광장의 지하에는 기존의 벙커를 개량하여 설립한 라모네다 문화센터(Centro Cultural Palacio de La Moneda)가 있다. 이 문화 센터에는 칠레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와 잉카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회가 개최되어 라모네다 궁과 함께 관광객들의 방문 명소가 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티아고의 주요 관광 자원 (세계지명사전 중남미편: 인문지명, (주)푸른길)
헌법광장 사법부 건물 앞에 세워진 아옌테 대통령 동상이 대통령 궁을 바라보고 있다.
☐ 살바도르 아옌데 고센(Salvador Allende Gossens) 대통령의 동상 1844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칠레는 1932년 이후 여러 차례의 쿠데타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불황에 시달려 왔다.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최초로 민주주의 선거에 의해 사회당 정권이 탄생하였으나 1973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가 발생하여 20여년간 폭압적인 군사독재에 신음해야했다. 쿠데타 당시 아옌데 대통령은, “누군가 이 암울하고 쓰라린 순간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 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라는 마지막 방송연설을 마치고, 소수의 지지자들과 모네다 궁에서 쿠데타군에 맞서 항전하다가 사망하였다. 아옌데 대통령에 대해 더 알아보기 |
☐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ón)과 빅토르 하라( (Victor Jara) ‘누에바 깐시온’의 어원은 1969년 라틴 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생겨났다.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제1회 누에바 깐시온이라는 행사의 이름으로 붙여졌던 것이 그 범위가 점점 더 넓어져 1970년대의 민족운동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 대회에 참가한 빅토르 하라는 자작곡 'Plegara a un laborador(한 노동자에게 바치는 기도)'로 우승을 차지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싹튼 뒤 그 범위가 넓어져 카리브해와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된 민족문화운동이었다. 시작 초기에는 전통 민속 문화에 대한 연구와 채집, 보급이 중심이었다. 칠레에서는 파블로 네루다의 권유로 비올레따 빠라에 의해 시작되어 로욜라(Margot Loyola), 피사로, 파바스 등으로 이어 졌다. 이런 노력은 점차 자신들의 문화가 단순히 스페인 등 유럽에서 이식되어 온 것이 아니라 안데스 고산지대에서 300여년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잉카조상의 후예 인디오 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자신들의 뿌리로서 그 문화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에 그런 의식을 민중에게도 널리 전파하였다. 이중에서도 빅토르 하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비올레타 빠라였다. 빠라는 칠레의 평원과 산악지역을 횡단하면서 습득한 지식과 대중예술을 바탕으로 자신의 노래를 만들어 남미 전역에 그녀의 이름을 알렸다. 민중들에게 강렬한 호소력을 지닌 이 운동은 이들이 작사한 노랫말과 인디오의 선율들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수백년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1970년대에는 이미 라틴 아메리카 민족운동의 큰 줄기로 자리 잡았다. 가난한 민중들을 억압하는 제도, 집단, 계급, 문화를 추방하는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독재정권과 지배자들의 기반을 허무는데 큰 몫을 했다. 정치에서 종속을 거부하고, 경제에서 착취를 반대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화에서 정체불명의 제국주의 문화 침투를 배격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이러한 저항운동에는 당연히 혹독한 탄압과 희생이 뒤따랐다. 이중에서도 빅토르 하라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의 승리를 위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아옌데 정부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그는 민중벽화운동, 민중발레단, 노래운동 등 다양한 방면의 민중문화 운동 세력을 결집시켰다. <벤세레모스>는 하라가 쓴 시로 첫 번째 선거운동 극이다. 쿠데타의 주모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에 의해 아옌데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에도 빅토르 하라는 고통받는 칠레 민중을 위해 노래 불렀다. 그리고 그의 노래를 멈추게 하려고 쿠데타 군은 그를 고문한 뒤 양 손목을 부러뜨리고 사살했다. 누에바 칸시온은 칠레의 음악, 라틴 아메리카만의 음악이 아닌 세계의 음악으로서, '제3세계를 포함한 전 세계 민중이 인종과 종교, 가치와 신념을 초월해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음악 언어'로 재정의 할 수 있다. 아따우알빠 유빵끼를 '누에바 칸시온의 아버지'라 한다면 비올레따 빠라는 '누에바 칸시온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빅토르 하라는 비올레따 빠라의 사상, 이념, 새노래 운동의 진정한 계승자라 할 수 있다. 또한 메르데세스 소사, 야뿌, 인티 이이마미, 낄라빠윤, 앙헬 빠라 등도 새 노래 운동을 표방해온 대표적인 밴드이자 가수이다. |
사법부 건물
헌법재판소 건물
모네다 대통령 궁 근위병
모네다 궁전 문화 센터(Centro Cultural la Moneda)
모네다 궁전 문화 센터의 입구의 조형물
시민 광장(Plaza de la Ciudadanía)
동상의 주인공은 알레산드리 팔마(Arturo Alessandri Palma) 칠레 대통령이다.
모네다 궁을 떠나 버스를 타고
산크리스토발 언덕 (San Cristobal Hill) 으로 향한다.
산크리스토발 언덕 (San Cristobal Hill)
산크리스토발(San Cristóbal) 산은 아르마스 광장에서 북동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산의 높이는 880m에 달하여 산티아고에서 최고로 높은 렝카 산(Cerro Renca, 905m) 다음으로 높은 곳이다.
언덕의 정상까지는 푸니쿨라(케이블카,funicular)나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올라갈 수 있다.
산크리스토발 산의 명칭은 스페인계 칠레 인 산 크리스토발(San Cristóbal)의 가문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본래의 명칭은 신의 장소 또는 신들이라는 의미의 ‘Tupahue’이다. 이 산은 산티아고 중심부에 위치하므로 아르마스 광장을 포함한 도시의 전경을 관람하려는 시민들과 관광객이 자주 찾는다. 또한 산의 정상에는 칠레 독립 2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에서 선물한 마리아 상(Imagen de la Virgen María)이 산티아고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매연으로 하늘이 뿌옇다.
공기 오염도가 서울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인다.
언덕을 내려와 한인 식당에서 품짐한 저녁 식사를 한 뒤
아르마스 광장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GEN HOTEL에 여장을 풀고 남미여행 5일째의 일정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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