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밍사산(鸣沙山 명사산)
돈황시에서 남쪽 방향으로 5㎞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래 산이다.
그 크기는 동서40㎞, 남북20㎞, 면적은 약 800㎢정도이다. '명사(鳴砂)'는 산언덕의 모래들이 바람에 굴러다니면서 나는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 같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 명사산은 실크로드 관광 명소 가운데 한 곳으로 관광객들은 모래썰매를 즐겨 타며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대단히 아름답다.
□ 웨야취안(月牙泉 월아천)
간쑤성(甘肃省, 감숙성) 둔황시(敦煌市, 돈황시)의 밍사산(鳴沙山, 명사산) 자락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호수로 고칭(古称)은 악와지(渥洼池), 사정(沙井) 및 약천(药泉)으로 불리었으며 한대부터 둔황팔경(敦煌八景)의 하나로 불리었고 청대에 이르러 웨야취안(月牙泉, 월아천)으로 바뀌었다.
미인의 눈썹처럼 곱게 휜 초승달 모양이 더없이 아름답고 천 년 넘게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다는 신비의 샘물이다. 둔황이 메마른 사막으로 변하자 이를 슬퍼한 천녀가 흘린 눈물이 오아시스가 되었다는 아름다운 전설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월아천은 둔황팔경 중 하나이며 길이가 100여 미터 폭이 15m 정도 이며 수심은 1m 내외라 한다. 과거에는 수심이 5m가 넘었다 하는데 점차 수량이 줄어들면서 당국에서도 적정수위 조절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나 도시의 팽창과 관광객 증가로 인한 물부족 현상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앞으로 수십년이 지나면 어떻게 변모해 있을지는 미지수다. 월아천 주위로 빙둘러 싼 명사산이 바람의 영향으로 모래언덕이 수시로 변하는데 반해 이곳 월아천을 메우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불가사의 한 일이다.
둔황에서 첫 일정은 월아천(月牙泉) 방문이다.
하늘은 비가 내릴 조짐이다.
여객중심(여행안내소)
가이드가 입장표를 구매하는 동안..
이 사진을 찍는다.
명사산월아천은 국가급풍경명승구5A에 해당하는 세계지질공원이다.
월아천은 내가 중학교 시절 여행책자에서 보고 늘 동경해 왔던 그곳이다.
덧신을 빌려 신고 출발한다.
낙타 타기 체험은 날씨관계로 일찍 종료했다고 한다.
이곳은 명월광장이다.
날씨는 을씨년 스럽지만..
여행객은 꾀 있다.
명사산월아천 안내도.
꼼꼼히 읽어보고 지붕이 없는 관광차를 타고 월아천 입구까지 간다.
중국여행은 모든게 돈이다. 산에 갈때도 산입구까지 셔틀버스를 타고 가니 말이다.
대상의 행열을 연상케 하는 낙타 타기 체함자들이 지나간다.
소천탄광장에서 내려 월아천으로 향한다.
모래폭풍이 몰아친다.
월아천(月牙泉)
미인의 눈썹처럼 곱게 휜 초승달 모양이 더없이 아름답고 천 년 넘게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다는 신비의 샘물이다.
둔황이 메마른 사막으로 변하자 이를 슬퍼한 천녀가 흘린 눈물이 오아시스가 되었다는 아름다운 전설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밍사산(鸣沙山 명사산)
'명사(鳴砂)'는 산언덕의 모래들이 바람에 굴러다니면서 나는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 같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 명사산은 실크로드 관광 명소 가운데 한 곳으로 관광객들은 모래썰매를 즐겨 타며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대단히 아름답다.
여행객이 비켜주길 기다렸다가 사진을 담는다.
중학교때 여행책자에서 보았던 그모습 그대로다..월천각과 어울러진 모습이 멋지고, 아름답고, 감동 그 자체다.
모래언덕의 곡선과 잘 어우러지는 한장의 그림이다.
수심은 1m 내외 라지만 물빛은 푸르름을 띠고 있다.
저 끝 몇 그루의 나무가 보이는 곳이 소천탄광장이다.
월천각(月泉阁)
함등..차와 음료를 파는곳인데 왠지 썰렁한 느낌이다.
반대편에서 바라본 월아천
월천고류(極果古柳)
수명이 120여년 된 능수버들이다.
이젠 제법 비가 내린다.
명사산을 오른다..촉촉히 내리는 빗줄기가 모래먼지를 막아준다.
많은 여행객이 명사산을 오른다.
산위에서 내려다 보는 월아천 역시 멋지다.
당겨 본다.
사막언덕을 달리는 지프
명사산의 모래언덕..자연이 만든 작품이다.
저 너머 멀리에 내일 가게될 막고굴이 있다.
월천각과 월아천의 아름다운 조화.
월아천 주위로 빙둘러 싼 명사산이 바람의 영향으로 모래언덕이
수시로 변하는데 반해 이곳 월아천을 메우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불가사의 한 일이다.
훗날 다시 오게 된다면
날씨가 맑아 명사산 위에서 해넘이를 보고 내려왔으면 좋겠다.
둔황의 마스코트 '비파를 타는 여인'
□ 둔황(敦煌 돈황 Dunhuang)
돈황(敦煌)이라는 돈 자는 크다는 뜻이며 황 자는 번성하다는 뜻이다. 즉 ‘크고 번성한 곳’이라는 뜻이 된다.
돈황시는 감숙성의 서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주취안지구(酒泉地區) 에 속해 있다.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를 따라 펼쳐진 전통적인 중국인 거주지의 서쪽 끝에 해당하며, 서양에서 중국 통치영역으로 들어가는 외국상인들이 처음으로 거쳐 가는 교역도시이다.
시의 면적은 3.12만㎢이며 그중 오아시스의 면적은 1400㎢로서 전체면적의 4.5%를 차지한다. 도시가 사막과 고비 땅에 포위되어 있어 옛날부터 고비의 오아시스로 불렸다. 돈황시는 동쪽에 삼위산, 남쪽에 명사산, 서쪽은 사막, 북쪽은 고비 땅이다. 평균해발이 1200m이다.
돈황의 역사는 기원전 111년 한무제가 흉노족을 정복하고 하서 4군의 하나로 돈황군을 두고 역내에는 한인을 이주시켜서 서역 지배의 거점으로 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돈황은 탑리목 분지의 북과 남을 지나는 북로, 남로의 거점으로서 실크로드의 요충지가 되었다. 예로부터 비단길의 동쪽, 중부 각 노선이 합쳐지는 중추적 역할을 했다. 비단길이 신강으로 진입하는 3갈래 노선은 모두 돈황을 출발점으로 했으며, 동래서왕(東來西往)의 상인과 여객이 모두 돈황을 거쳤다. 때문에 역사 서적에 “서역의 모든 길은 모두 돈황으로 집결 된다”고 씌어져 있다. 이 실크로드를 통해서 후한시대에는 불교가 중국 본토에 전해졌으며, 동진시대에는 유명한 막고굴이 만들어 졌다.
당시 돈황은 동서 무역의 대상들이 왕래하는 길목으로서 번영하였고, 중원의 전란을 면한 요충지였다. 이때로부터 돈황은 중서교류의 중요한 지역으로 자리 잡으며 중국정부가 서역을 다스리는 거점으로 된다. 각국의 사신, 상인, 승려들의 왕래가 빈번해졌으며 이들은 모두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돈황을 경유하여야 되었다. 당대 645년,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돌아오던 중 머물렀으며, 이후 8세기 반에 걸쳐 왕래가 성하게 되어 황금시대를 맞았다. 그만큼 구법승들의 이동도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막고굴의 수천 개의 석굴은 구법 역사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돈황은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경내에는 명승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고 자연경치가 특이하고 아름답다. 현존하는 석굴, 사원의 유적, 고분, 한나라 시기의 장성, 관문, 고성, 봉화대, 고대 역참 등 문물 관광지역이 무려 241개소에 달한다. 1986년에 돈황은 국무원에 의하여 중국역사문화명성으로 지정됐으며, 막고굴은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증서를 획득했다. 1998년 돈황시는 다시 정부로부터 중국 우수 유람도시로 평가받았다.
밤이 되면 화려한 불빛으로 관광객을 유혹하는 둔황야시장
둔황(敦煌)은 중국 깐수성 서부 주취안지구 하서주랑(河西走廊)서쪽 끝, 당허강(黨河) 유역 사막지대에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이다.
타림분지 동쪽 변두리에 위치한 둔황은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고대의 동서교역·문화교류 및 중국의 서역 경영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BC 1세기 초에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는 이곳을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아 하서사군중 하나인 둔황군(敦煌郡)을 두고 부근에 옥문관(玉门关)과 양관(阳关)의 두 관문을 설치하는 한편, 둔전병(屯田兵)과 한인(漢人)의 식민을 투입함으로써 둔황은 그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뒤 타림분지의 한 오아시스는 중국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변경도시로 변모하고, 서방과의 접촉지를 차지하여 한인·페르시아인·투르크인·인도인 등 여러 종족이 어울려 사는 국제성을 띤 무역도시로 번영하였다.
5호 16국시대의 한족의 국가 서량(西凉:400∼421)이 둔황을 국도(國都)로 삼았던 사실은 그 발전상을 말해준다.
서량이 멸망한 뒤, 둔황은 북량(北凉)·북위의 지배를 거쳐 수·당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8세기 말에는 토번(吐蕃)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9세기 중엽 이후는 당나라의 귀의군절도사(歸義軍節度使)의 지방정권을 받게 되었다. 한때 독립하여 금산국(金山國)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11세기 초 다시 서하(西夏)의 지배 아래 들어간 뒤부터 둔황은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그 뒤, 원대(元代)에 사주로(沙州路)의 치소(治所)가 되고, 명대(明代)에 사주위(沙州衛)가 되었으나 그 벽지화(僻地化)는 피할 수 없었으며, 또 과거의 불교 사찰이나 석굴사원도 쇠미해져서 청말(淸末)에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Aurel Stein)이 둔황 막고굴(敦煌莫高窟)을 찾았을 때는 도사(道士)와 몇몇 사람의 라마승만이 살았다고 한다.
'중국여행산행 > 실크로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선(鄯善) 쿠무타크 사막 (0) | 2019.11.13 |
---|---|
둔황 막고굴(莫高窟 Mogao caves) (0) | 2019.10.30 |
만리장성의 서쪽 끝 쟈위관(嘉峪关 가욕관) (0) | 2019.10.18 |
란저우 황하모친조소상 (0) | 2019.10.17 |
실크로드(Silk Road : 緋緞 비단길) (0) | 2019.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