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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간칠정맥/백두대간[完]

백두대간 10구간(신의터재 - 갈령)



산행일자
2006. 7. 25, 날씨 맑음.

구간코스
신의터재 - 윤지미산 - 화령재 - 봉황산 - 비재 - 못재 - 강령 삼거리 - 갈령
산행거리 24.46 km(접속구간 1.2 km), 산행시간 10:20분 신의터재 출발, 17:25분 갈령 도착, 7시간 05분 소요


교통편
06:30분 남부터미널 출발, 10:00분 화령버스터미널에 도착, 택시로 신의터재에 10:20분에 도착, 10:20분 산행시작, 17:25분에 산행종료 후 갈령에서 승용차 얻어타고 화북으로 이동, 17:40분 청주행 버스 탑승, 19:35분 청주도착, 20:00분 서울행(남부터미널)버스 탑승, 21:35분 서울 도착, 지하철 2호선 신도림역 하차.


 

 

신의터재, 상주시 화동면 소재 2차선 포장도


 

 

엉겅퀴

 

 

 

 

윤지미산(맨뒤)과 무지개산(중간)


 

 

 

윤지미산 정상(538 m)


 

 

 

 

 

정자에서 도로를 따라 화령 방향으로 300 m 내려온 지점의 백두대간 안내도



 

 

지기재 산장 안내판,


 

 

 

대궐터산


 

 

 

산불감시 초소



 

봉황산



 

산불감시 초소 조금 지난 전망대에서 뒤돌아본 대간길, 저멀리 윤지미산이 보인다.


 

 

봉황산 정상(740.8 m)


 

 

봉황산 정상 조금 지난 지점에서 바라본 대간길, 좌측은 459봉 그넘어로 510봉이 희미하게 보인다.



 

 

비재, 상주시 화남면 소재


 

 

510봉 오르다 뒤돌아 본 봉황산(우측), 459봉(중앙), 좌측(대궐터산).


 

 

못재


 

 

못재 조금 지난 지점의 헬기장


 

 

 

갈령 삼거리



 

 

 

강령으로 하산 하다 암릉구간에서 바라본 형제봉(상), 대권터산(하)


 

 

강령으로 하산길에 있는 헬기장



 

 

갈령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소재



중화의 중심 화령(化寧) 5일장

화서면사무소가 있는 화령은 고개 들머리에 놓인 작은 산읍이다. 신라가 답달비라 하다가 화령군(化寧郡)으로 고친 것을 훗날 현으로 바꾸어 상주목 아래 두었다. 택리지에는, “상주 서쪽은 화령(火嶺)이요 고개 서쪽은 충청도 보은인데 화령은 소재 노수(1515-1590)의 고향”이라 하였다. 오늘날에는 25번 국도가 지나지만 딱히 들어 내세울 만한 물산이나 풍습이 없는 탓에 여전히 한적한 시골을 면치 못한 곳이다. 굳이 들자면, 고려 시대부터 내려왔다는 화령 장터가 아직도 소문난 닷새장으로 유명하다.

화서면 청계 마을에 후백제왕 견훤을 섬기는 산신당이 있다 하여 찾아갔다가 마을 뒷산에 버려진 절터의 부도와 견훤의 대궐터라 부르는 산성을 구경하느라 남은 해가 다 저물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화령 장날인데 다시 봄비가 내렸다. 가뜩이나 시들해져 가는 시골 장터의 행색이 봄비 속에 더욱 초라하다. 기껏 할머니 몇이 봄나물을 펴놓고 앉아 담배를 빼어물고, 영동에서 왔다는 젊은 묘목상은 바야흐로 활짝 핀 옥매화를 바라보며 그저 심심하다. 장터 모퉁이에 소쿠리, 키, 치룽 같은 목물을 쌓아둔 가게로 가 보니 아예 문을 반쯤만 열었는데 손님은 물론 주인도 안 보인다.

화령 장터에서 재성약국을 운영하는 한규정(35)은 나의 동향이자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오랜 벗이다. 본래 모두 궁벽한 산골에서 자랐지만 자라서도 대처보다는 끝내 산 읍이 좋아 이 곳에 터를 잡은 지 벌써 칠팔 년은 지났다. 벗이 소개하여 늦은 아침상을 차려준 태봉 식당의 유점순(84) 할머니는 아랫녘 거창이 고향이다. 9살에 중풍을 맞았다는 남편에게 속아 시집왔다는 할머니의 지난 한 평생도 돌아보면 온통 억새풀 일렁이는 날들이었다.

함창의 물레 공장을 다니면서 시집의 열 식구 살림을 꾸려내고 한때는 김설매라는 서울 기생의 집에서 침모를 살다가 변두리 어느 방직 회사에도 다녔다. 둘째 아들과 함께 사는 할머니는 요즘 그저 텔레비전만 본다고 했다. 올해에는 서울 막내 아들네에 있던 주민등록을 고향으로 옮겼다. 보성고보를 다니다가 북으로 간 큰아들이 늘그막에 더욱 간절하여, 행여 살았으면 에미를 찾지 않겠냐고 자꾸만 눈주름을 훔쳤다.


송천이 발원하는 봉황산

유점순 할머니의 이야기에 붙들려 아침 먹기로 들어간 식당을 점심에야 나섰다. 화령 장터를 빠져나오면 이내 화령 고갯길이 시작되지만 본래 한없이 키를 낮춘 고개이니 여느 길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마을 길이 끝나는 산모롱이에는 크고 작은 비석들이 즐비하고 고려 초엽의 유물로 보이는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다. 비석들은 유달리 치열했다는 한국전쟁의 화령 전투가 남긴 흔적이 대부분이고, 몇은 여느 고을마다 흔한 관리들의 행적이다. 여래상은 풍상의 세월을 견디느라 닳고 닳았는데 광배만은 아직도 번듯하다. 다만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울타리로 두른 쇠창살이 불상을 너무 바투 가두어 답답하다. 아마도 이웃 상봉 마을에 있던 여래상을 도둑맞은 뒤에 그리한 모양이다.

화령 고갯마루의 화령정(火嶺亭)은 비록 예스러운 빛은 없으나 고갯길의 내력을 친절히 적어 편액 대신으로 걸었다. 아득하게는 성읍국가 시절부터 삼국의 싸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화령에 쌓인 이야기를 알리는데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뒤를 돌아보니 백두대간이 빚어 올린 봉황산이 바투 어여쁘다. 중종의 태를 묻었다는 전설에 힘입어 마을에서 태봉산(胎封山)이라 부르는 봉황산은 송천을 발원시키는 화령의 진산(鎭山)이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는 “송천은 상주의 구봉산(九峯山)에서 발원하여 화령(化寧) 과 중모현을 지나 황간현에 이른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峰)산이라 한다"는 기록과 함께 고을 동쪽 43리에 또 다른 구봉(九峯)산이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조선광문회 본 「산경표」(1913)에는 속리산, 구봉(峯)산, 봉황산이 모두 함께 나란히 나온다. 백두대간의 산줄기 가운데 『증보문헌비고』의 기록, 즉 화령과 중모현을 지나 황간현에 이르는 송천의 발원으로 알맞은 산은 오로지 봉황산 뿐이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이 틀리지 않으려면 구봉산을 봉황산으로 바꾸거나 혹은 구봉산이 곧 봉황산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산경표」는 분명히 봉황산과 구봉산을 별개의 산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자면 구봉(峯)산은 구봉(峰)산(=속리산)과도 별개의 산이다.

기록을 종합하여 볼 때, 구봉산은 거리와 이름과 산세로 보아 관기의 구병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은 송천이 발원하는 봉황산을 구병산으로 착각한 것이다. 물줄기의 발원을 착각하는 일은 옛날에도 흔히 있었다. 구병산은 다만 백두 대간에서 갈라져 나가 보청천 상류의 골물에 둘러쌓인 외딴 봉우리에 지나지 않는다. 백두 대간의 봉우리도 아니므로 숙제는 역시「산경표」에도 남는다.


『마음도 쉬어가는 고개를 찾아서』-김하돈 글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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