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대간칠정맥/백두대간[完]

백두대간 28구간(조침령 - 한계령)



 


산행일자
2008. 5. 17, 날씨 맑음.
교통편
전날 27구간 산행 종료 후 쇠나드리 민박집에서 1박, 아침 일찍 다시 조침령에 올라 산행시작.
산행종료 후 한계령에서 16시30분 동서울행 버스 탑승하여 귀가함. 



 

조침령, 이번 산행의 들머리이며 백두대간의 중간지점이다.


 


표시석의 뒷면, 조침령의 유래, 백두대간의 가치와 중요성을 생각하며...


 


전망대 지나 10분거리에 세워진 이정표


 


943봉 오르며 뒤 돌아본 조침령 방향


 


1018봉 지나 30분 거리에 있는 이정표


 


1133봉 오르며 뒤 돌아본 1018봉


 

 

북암령, 넓은 공터가 특징이다.


 


875봉을 내려와 단목령으로 가는 산길은 새소리와 계곡 물소리가 어우러져 신선함이 더해진다.


 

 
 

단목령, 좌측 계곡 50 m 지점의 계곡물이 있고 조금 더 내려가면 민박집이 여러 곳 있다.


 


단목령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계단길


 


856봉의 삼각점


 


856봉 지나 30분 거리에 있는 이정표


 


오색 삼거리 이정표


 


오색 사거리 이정표


 


점봉산을 오르며 뒷 돌아본 오색 방향


 

 

점봉산 정상, 우측으로 설악의 삼청이 보인다.


 


1256봉과 작은 점봉산, 그 너머로는 야생화 천국인 곰배령이 있다.


 

 
 
 

점봉산의 야생화


 


점봉산을 내려 서며...망대암산(앞), 1158봉(중간), 귀때기청봉(뒤)이 보인다.


 


망대암산과 점봉산의 안부


 


망대암산에서 뒤 돌아본 점봉산


 

 
 

푸르름과 기암괴석이 빗어내는 풍경


 


암릉구간에서 바라본 한계령


 


암릉구간에서 바라본 922봉


 


암릉구간에서 바라본 설악의 삼청, 1474봉, 끝청, 중청, 대청이 한눈에 보인다.


 


암릉구간에서 바라본 가리봉


 


가까이 다가선 한계령


 

 

푸르름의 신록과 바위의 조화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과 양양군 서면을 잇는 451번 지방도로, 왜 이리로 내려왔는지는 묻지 마쇼!!


 


도로를 따라 한계령으로...


 


단목령에서 한컷



한계령

마의태자의 전설이 깃든 한계(寒溪)

인제 읍에서 설악의 들목으로 만나는 원통(元通)은 본래 원통역(圓通驛)이 그 근원인데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이름 내력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오가며 흔히 우스갯소리로,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고 한다. 어떤 이는 한 임금이 설악에 파천(播遷)하여 도성으로 차사를 띄울 적에 매양 돌아오지 않으므로 생겨난 말이라 하나 그리 따를만한 전설은 아니다. 한계령 길을 함께 떠난 서화 중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치는 이대건(38) 선생은 첩첩산중 휴전선 근처로 배속받은 군인들 사이에서 생겨난 말이라고 했다.

명산이란 본래 유람에나 좋은 땅이지 터를 두고 살기에는 불편한 곳이다. 탈속의 나그네야 더없이 즐거운 설악의 풍광이지만 생계를 작정으로 산중에 깃든 민생들의 호구지책이야 논밭 한 뙈기가 마뜩찮은 명승을 어디에 쓰겠는가. 그렇듯 사는 일이 내내 고단하였지만 그래도 명산 그늘이라고 한껏 멋을 부린 이름이 바로 한계 마을이다. 한계는 풍진 영화를 한낮 베옷 품에 감추고 세속를 떠나던 마의태자의 전설이 곳곳에 서린 곳이다. 「신라김씨대종원」의 기록에는 '태자 일행이 서울을 떠난 것은 935년 10월 하순이고, 한계에 닿은 것은 살을 에는 추위와 눈보라 몰아치는 혹독한 겨울이었다'고 한다.

한계령 길과 미시령 길은 한계리 재내(瓦川) 마을에서 갈린다. 옛날에 기와를 구워 사람들이 줄지어 날랐다는 내력으로 얻은 이름이다. 재내에 사는 홍기주(65)옹은 내설악의 고갯길과 더불어 늙어온 사람이다. 지금의 한계령이야 소문도 부산한 관광길이 되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에는 그저 사람 하나 걷기에 맞춤한 잎새 우거진 오솔길이었다. 1971년, 군장비로 고갯길을 뚫고 한계의 지명을 따라 새로 붙였다는 한계령의 이름에 대하여 물었더니, "웬걸, 우리 어려서 왜정 때두 그렇게 부른 걸" 하면서 고개를 젓는다.


소동라령과 오색령, 그리고 한계령

그러나 '왜정 때'도 불렀다는 그 한계령이 좀처럼 옛 글에는 보이질 않는다. 다만 한계는 옛 이름이되 한계령은 그리 오래 묵은 옛 이름이 아닌 탓이다. 한계령의 본명으로 유력하게 들먹이는 이름이 소동라령과 오색령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 편에는 소동라령에 대하여,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산줄기가 겹치고 포개져 지세가 험하고 궁벽하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없 어졌다" 하였고, 『증보문헌비고』「여지고」의 양양 편에는 "오색령은 인제의 영로이며 소동라령, 조침령, 구룡령은 모두 강릉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적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되는 중종 25년(1530년) 무렵은 소동라령이란 이름으로 부르던 한계령 길이 너무 험하다는 이유로 폐하고 이미 미시령 길을 새로 개척한 다음이다. 조선시대 초엽까지 한양 길로 삼았던 소동라령이 풀숲에 묻히면서 점차 그 쓰임새를 잃고 마는 것이다. 다만 같은 책에 실린 남대천의 설명으로 "강릉부 오대산에서 나오며 소동라령의 물과 합쳐 부의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 간다"는 대목을 보면 적어도 소동라령이 지금의 한계령 길을 의미하고 있음은 뚜렷한 사실로 보인다. 훗날 『동국여지승람』의 근간이 되는 『세종실록지리지』 (1454년) 양양도호부 편 역시 소동라령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전의 문헌이 오직 소동라령을 고집하는 반면, 조선시대 말엽에 간행되는 문헌에는 오색령의 출현이 두드러진다. 『여지도서』(1760년), 『대동여지도』(1861년), 『증보문헌비고』(1908) 같은 기록에는 모두 한계령을 오색령으로 표기하고 있다. 짐작컨대, 이는 분명 오색약수를 비롯한 명승을 탐방 하는 길과 관련된 이름일 터이다. 이미 오래 전에 흔적을 잃은 소동라령의 존재는 잊혀지고 남설악으로 통하는 고갯길에 대한 새 이름으로 오색령이 등장한 것이다. 다만 오색령과 소동라령이 더불어 쓰인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은 얼핏 신뢰성을 잃고 있다. 왜냐하면, "소동라령, 조침령, 구룡령은 모두 강릉으로 통하 는 길"이라고 쓴 것은 틀림없이 어림에 의한 오기(誤記)이기 때문이다.


『 '마음도 쉬어가는 고개를 찾아서' 에서 발췌, 김하돈 글 』




■ bgm : Los Laikas - ♪ Encuentro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