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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간칠정맥/백두대간[完]

백두대간 31구간(미시령 - 진부령)





산행일자
2009. 8. 10, 날씨 비온 후 흐림.

구간코스
미시령 - 상봉 - 화암재 - 신선봉 - 대간령 - 병풍바위봉 - 마산 - 진부령
산행거리 : 15.6 km, 산행시간 : 05:30분 미시령 출발, 13:10분 진부령 도착, 7시간 40분 소요

교통편
하루 전날 서울고속터미널에서 속초행 심야 우등버스 탑승(23:30), 02:20분경 속초터미널 도착, 인근 해수피아 찜질방에서
잠시 쉬고 04:50분경에 나와 인근 포장마차에서 간단히 아침식사(우동), 택시를 이용 미시령 도착 후 산행 시작, 산행종료 후
진부령에서 15:20분에 동서울행 버스 탑승, 18:10분경 동서울터미널 도착.



 


미시령 휴계소, 안개비가 내린다.






45분 걸어 도착한 샘터


 

 





상봉 직전의 헬기장과 상봉(1,239 m)






신선봉으로 진행하다 전망대에서 뒤돌아 본 상봉






신선봉(1,204 m)






뒤돌아 본 신선봉



 

 


 




대간령(새이령)







안개는 병풍바위봉을 휘감고...이슬에 온몸은 다 젖고 이제 등산화에서 '찌걱 찌걱' 소리가 난다.



 

 




병풍방위봉




 




마산봉 갈림길





 
 마산봉(1,052 m)






마산봉 하산길 중간 지점




 




알프스 스키장, 대간길은 리프트를 따라 가다 오른쪽으로 향한다.


 

 



리프트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마산을 다 내려온 지점, 예전에 없던 이정표가 만들어 졌다.



 

 



콘도옆 공터를 지나 얕은 뚝을 넘어서 보면 아래(왼쪽) 50 m 지점에 이정표가 있다.



 



이 임도를 따라 5분정도 가면 아래의 이점표가 보인다.







이정표 뒤에는 웅덩이, 오른쪽에는 전봇대가 서있다.




 




건물아래 시멘트 포장길 삼거리에 이정표가 서있다.





아치가 보이는 왼쪽으로 포장길을 따라간다.


 






아치를 지나 30 m 지점에 군 초소가 있고 이곳에서 포장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향한다.
 






작은 숲길을 5분정도 걸으면 나무계단을 내려서게 된다.






 
이 길을 따라 20여분 걸으면 아래의 집이 보인다.







 






집 앞을 지나면 바로 삼거리에 이정표가 있다.


 



임도를 걷다 보면 왼쪽으로 마산봉(사진 왼쪽), 병붕바위봉(사진 오른쪽)이 보인다.










임도 왼쪽에 있는 농장(여러 마리의 개가 엄청나게 지져댐)을 지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내려오면
삼거리에 이정표가 오른쪽을 가리킨다. 물론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가도 진부령에 도착한다.
예전에는 종종 있었던 일이라고들 한다. 



 



숲길을 따라 10분정도 걸으면 이곳을 내려선다. 대간길은 도로를 건너 오른쪽으로 20 m 지점에 있다



 






도로를 건너 대간길로 들어서려니 밧줄로 막아 놓고 '진입금지' 가 표기되어 있어 지나치고
이곳에 들른다. 개인, 또는 각 산악회에서 백두대간종주 기념비를 세워 놓은 곳이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 오다 이곳을 내려서니..







백두대간 남녘 종착지인 진부령이다.

 




진부령,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과 인제군 북면을 잇는 46번 국도상의 고개마루.



 



곰상













백두대간표시석,
백두대간은 국토의 등줄기로서 남과 북을 잇는 주축이며, 자연 생태계의 핵심축을 이루는 생물 다양성의 보고 입니다. 그러나 백두대간은 그 실체나 가치가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에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이미 상당 부분이 단절 또는 훼손 되었으며, 현재도 '보전과 이용' 이라는 상충된 가치 사이에 마찰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백두대간은 지형, 기후, 토양, 수문 등 자연환경과 온갖 동식물이 어우러진 생태계, 그리고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복합적인 3차원의 공간으로서 매우 다양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라는 백두대간의 의미을 담은 글이 쓰여져 있다. 




 




 


다시 이 자리에 서서 북녘의 금강산을 지나 백두산에 올라설 날을 고대하며 셀카로 한컷...2009. 8. 10.




진부령


남녘 백두대간의 종착역

중동무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이나 말이 끝맺음에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흐지부지 되는 경우에 쓰는 말이니 물론 썩 기분 좋은 본새는 아니다. 진부령 가는 길에 난데없이 이 시답잖은 낱말을 들먹이는 심사가 자못 불편하다. 나그네의 타고난 천성이 게으르고 우통하여 종종 귀에 박히던 말이기도 하거니와, 곰곰 생각해 보면 깊은 속내에 사무쳐 차마 더 말 잇지 못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에 끼치는 말이니 그 또한 측은한 소용이다.

애써 찾아온 봄을 집에 두고 겨울이 한창인 진부령으로 간다. 더는 갈래야 갈 수도 없는 곳. 사람이 만들고 사람에게나 유효하여 본래 세월이나 산천처럼 사람 아닌 것에는 그런 일이 없는 줄 알았는데, 거기 진부령에 가면 저 오랜 분단의 시절도 우뚝 멈추어 더 흐르지 않고, 저 거칠 것도 없는 국토의 등뼈 백두대간마저 그깟 총부리에 가로막혀 짐짓 발길을 멈춘다. 사람이 사람의 길을 막는 일이야 풍진 속세의 숙업이겠지만, 사람에게 막혀 더 흐르지 못하는 이 나라의 세월과 산천은 대체 지난날 무엇을 잘못했는가. 묻는다. 허리 잘린 백두대간의 기운 아직도 여여(如如)하신가.


춘삼월 봄눈 내리는 내설악

한계리 재내마을에서 한계령과 헤어진 길은 미시령과 진부령을 바라보며 북으로 북으로 오른다. 설악의 품도 내설악에서는 제법 온순하여 길도 그저 곱게 꼬리를 감추는 사뭇 착한 길이다. 남녘에는 이미 동백이 피고 지고 우수 지난 지가 언제인데 다만 이 곳은 아직도 겨울이 한창이니 세상에 오가는 계절이란 참으로 새삼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아파트 난간 마루에 두고 온 영산홍의 기억이 설악의 흰 눈밭을 붉게 물들였다. 봄눈이란 으레 분분하기 마련인데 때아닌 폭설이 춘삼월을 덮는다.

군부대와 마을이 반반을 이루는 남교 마을은 대승령(해발 1210)으로 오르는 십이선녀탕 골짜기의 들목이다. 미시령길로 역로가 한창이던 무렵 이 곳에는 남교역이 있었다. 옛길을 걸어 아침에 원통역을 떠난 길이라면 점심을 들기가 좀 이를 듯 싶고, 거꾸로 원암역을 떠나 미시령을 넘어오는 길이라면 날랜 걸음이라도 점심은 거르고 늦은 곁두리나 먹을 거리이다.

남교를 지나 얼마쯤이면 금세 백담사 들목의 가평(加 坪)이다. 인제문화원의 책에는 백담사 매표소가 있는 내가평에 가력원(加歷院)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남교역은 현(인제)의 북쪽 50리, 가력원은 현의 동쪽 72리 양양부와의 경계”라고 했다. 옛글을 따른다면 가력원은 소동라령(한계령) 정상쯤이 되어야 할 터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가평에서 마등령(1327) 길을 따라 20리 남짓, 만해 한용운의 백담사는 잘 있었다. 시절을 따라 인물이 들고나니 거기 산중 가람의 흥망성쇠 또한 머무는 사람을 따라 영욕을 거듭하는 터라 선지식이 머물면 청정한 도량이요, 무참괴승(無 傀僧)이 머물면 이내 여염의 별채가 되는 법이다.

백담사의 지난 시절에는, 선(禪)과 시(詩)의 배를 타고 대승의 바다를 건너간 선각이 야단법석(野壇法席)의 사자후를 토하는 시절도 있었고, 총과 칼로 피의 바다를 건너온 아수라가 염마졸(閻魔卒)을 거느리고 관광버스 줄을 세워 야단법석을 떠는 시절도 있었다. 그래도 백담사는 잘 있었다. 다만 마음 하나 고쳐 먹으면 삼라만상이 모두 부처라고 오늘도 변함없이 잘 있었다.


풀숲에 묻힌 옛길은 말이 없고..

지금은 남교, 가평, 용대를 한데 모아 그저 용대리로 부르지만 본래의 용대는 미시령과 진부령의 갈림길에 놓인 마을이다. 남교에서 가평은 10리가 조금 넘고 가평에서 용대는 10리 길에 조금 못미친다. 용대의 갈림길에는 도시 한복판에나 어울릴 듯한 으리으리한 찻집과 식당이 자리잡은 지 꽤 오래 되었고 이제 여느 민가는 없다. 갈림길 조금 아래로 난 마을길을 들어가 보니 대충 열 집이나 넘어 보이는 동네에 사람도 통 보이지 않고 제법 큰 황태 덕장인데 황태 역시 한 마리도 안 보인다.

용대에서 오른쪽이면 미시령이요, 왼쪽이면 진부령이다. 금강산에서 무산과 마기라산 (麻耆羅山)으로 달려온 백두대간이 진부령과 미시령을 건너면 이내 설악산이다.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에는 지금은 풀숲에 가려 등산꾼들도 여간해서 잘 다니지 않는 옛길 대간령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양강 상류 미륵천의 근원 가운데 하나로 운운하는 ‘소파령의 물길’이란 바로 대간령의 물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소파령은 택당 이식(1584-1647)의 『수성지』에 '석파령이라고도 하고, 한때 사자원(獅子院)이 있었기에 원기령이라고도 한다' 했고, 그 밖의 옛글에도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고개인데 무슨 까닭인지 오늘날은 대간령이란 낯선 이름으로 통한다. 소간령은 진부령 아래서 대간령을 향해 골짜기를 거스르다 만나는 고개인데 그 역시 대간령과 함께 새로 생긴 이름이다.

소문이야 으레 한계령, 미시령과 더불어 설악의 준령으로 손꼽히지만 진부령길은 여느 고개와는 견줄 바 없이 녹록하고 수더분하다. 높지 않으니 가파르지 않고, 가파르지 않으니 험하지 않다. 길도 슬슬 몇 구비 돌다 보면 어느새 고갯마루에 닿고, 고갯마루에는 버스가 서는 차부가 있는가 하면 이런 저런 가게들이 마을을 이루어 백두 대간의 고갯마루로는 통 믿기질 않는다. 고갯마루가 이미 마을을 이루었으니 예로부 터 부르기를 ‘조쟁이’라 하였다. 지난 날, 영동의 해산물과 영서의 곡물이 마주 올라와 ‘이른 아침부터 장이 선다’ 는 내력으로 얻은 이름이다.


오, 통곡의 금줄-민통선

요즈음 부르는 이름으로 조쟁이는 흘3리다. 현주소는 고성군 간성읍을 따른다. 본래 금강산 아래 아름다운 바닷가 고을이던 고성과 간성이 분단선을 사이에 두고 그만 남북으로 나뉘었다. 고성은 북녘 땅이 되고 간성은 남녘 땅이 되고. 남녘 땅에 붙여진 고성군의 명칭은 다만 창졸한 사이에 코앞의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의 향수를 다독이는 이름이다. 백두대간의 고갯마루, 하늘 아래 첫 동네 흘리는 비록 간성읍을 따르지만 워낙 외진 곳이라 따로 흘리출장소를 두었다. 간성이래도 흘리는 품 밖의 간성이다.

진부령 길은 이제 어엿한 국도가 되어 제법 오가는 발길이 많이 늘었지만, 알고 보면 마치 몸뚱이의 절반을 쓰지 못하는 반신불수의 운명처럼 아주 가엾고 애처로운 길이다. 사람들은 그저 이름도 그럴싸한 알프스의 추억으로 이국적인 스키장의 낭만을 떠올리고, 겨울이면 으레 눈이 키보다 높게 쌓이는 고산지대의 설원을 그리며 마음 들뜨지만, 정작 그 고갯길로 말미암아 저 통곡의 금줄 ‘민간인출입통제선’이 시작되고 있음에는 별 관심이 없다. 더더구나 남도의 끝자락 지리산 천왕봉에서부터 물경 1천 6백 80리를 거슬러 오르다가 분단선에 가로막혀 그만 속절없이 주저앉는 백두대간의 슬픔은 더욱 모른다.

아니 어쩌면 너무도 잘 안다. 진작에 이미 알아 속내에 사무치고 골수에 박혀 진부령에는 봄이 아주 늦게 온다. ‘하기사 봄도 오면 무엇하리’라던 시인은 언제 진부령의 봄을 보기라도 했는지. 강도 아니요 산도 아닌 것을,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늘과 땅이 갈리고 세상과 세상이 나뉘어 오른팔과 왼팔이 서로 마주보며 닿지 못하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비록 지금은 멀리서 아주 천천히 오는 봄을 기다리는 겨울 한철. 철책 아래 쌓인 흰 눈이 녹고 민통선 골짜기 얼음이 풀리면 백두에서 한라에서 숨가쁘게 치달아 온몸에 더운 피 흐르는 봄날이 오리라는 것을. 그러나 아직은 봄 같지 않은 봄만 오고 가는 여기 진부령. 그리하여 진부령의 봄은 늦게 왔다가 일찍 가버린다.


하늘 아래 첫 동네, 흘리(屹里)

조쟁이에서 진부령길과 헤어져 동쪽 백두대간을 따라 산마루 하나를 넘어서면 본래의 흘리 마을을 품은 드넓은 고원이 펼쳐진다. 해발 1052미터의 마산 아래 펼쳐진 고원은 애초부터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말을 위해 생겨난 듯 산은 높고 땅은 아득하다. 그 넓은 평원을 ‘안흘리’와 ‘밖흘리’로 나누어 부르는데 ‘꿈과 낭만의 슬로프’ 라는 알프스 스키장은 밖흘리에 있다. 밖흘리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스키장에 기대어 생계를 꾸린다. 길가에는 스키를 빌려주는 가게가 즐비하고 북유럽 양식으로 지은 화려한 건물들이 벌써부터 이국적인 냄새를 물씬 풍긴다.

흘리는 본래 화전으로 따비밭을 일구어 옥수수와 감자 같은 잡곡이나 겨우 먹고사는 천애의 산꼭대기 오지 마을이었다. 그 흘리에 스키장이 생기고 어언 30년이 흐르는 동안, 화전을 일구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 땅을 뜨고 이제는 스키장을 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새로 도회지 닮은 마을을 이루며 산다.

조쟁이에서는 차부집 할아버지가 흘리의 터줏대감이고, 밖흘리에서는 스키 대여점을 운영하는 아들과 함께 사는 장홍조(70) 할아버지가 스키장 이전의 흘리 사람이다. 장홍조 할아버지가 흘리로 들어오던 무렵의 진부령은 경운기도 겨워 오르지 못했다는 풀숲 오솔길이었다. 그는 흘리를 두고, “애쿠, 말두 마오, 논이라쿠 일궜는데 한 마지기서 베 한 섬두 안 되니 그런 마할 눔의 땅” 이라고 했다.

그 ‘마할 눔의 땅’이 금값으로 치솟고, 장사꾼이 몰려오고, 스키장의 슬로프가 된 옥수수 비탈밭에 사람들이 모박이를 하는 동안, 흘리는 점차 옛 모습을 버리고 그 이름도 찬란한 한국의 알프스로 변모했다. 아, 개발이란 이름의 전차! 그러나 그 개발도 다만 약삭빠른 장사꾼들의 개발일 뿐, 도무지 잇속에는 눈이 어두운 원주민들 에게 그깟 스키장이 다 무엇이랴.

돈 몇 푼 손에 쥐고 떠날 사람들은 서둘러 떠나고, 어디 간들 꿈같은 세상이랴고 죽으나 사나 정든 땅에 남겠다던 사람들은 남았다. 그렇게 ‘정승집 문간방’이 되어 스키장에 기대었던 지난 날들이, 그러나 흘리 사람 장홍조 할아버지는 차라리 서속에 나물죽 먹던 시절만 못했다고 슬며시 고개를 떨군다.


백두대간의 온전한 하나됨을 위하여

나는 올 겨울에만 흘리의 스키장에 꼭 세 번을 갔었다. 물론 여태 그만한 푼수가 되지 못해 한 번 신어 본 적도 없는 스키를 타러 간 것은 아니었다. 첫번째는 한계령 다녀가는 길에 멀리서나마 눈 쌓인 마기라산의 향로봉이 보고 싶어서였고, 두번째는 미시령 지나는 길에 괜히 섭섭하여 한 번 더 찾았었다. 덧두리 같은 얘기는, 흘리의 스키장에 몰아닥친 아이엠에프 한파 역시 유달리 매서웠다는 것이다. 올 때마다 눈비탈은 언제나 썰렁했다. 스키를 타는 이들은 기껏해야 대여섯, 조금 많다 해도 겨우 열을 넘지 못했다. 올 겨울 흘리의 돈벌이는 아예 하나같이 '문 열어놓고 쉬는 게 일'이었다.

여느 해 같으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그나마 하루에 리프트 두 번 타기가 어려울 정도였단다. 그건 그렇고, 이제 텅 비어 있는 스키장 주자장에 차를 세우고 저 먼 곳으로 뒤를 돌아보라. 마산에서 흘리를 지난 백두대간이 진부령을 건너 바투 솟구쳐 오르는 곳이 민통선의 칠절봉(해발 1,172 m)이다.

칠절봉에서 다시 북쪽으로 머리를 돌려 마기라산을 향해 달리는 대간의 연봉들은 곧 무산에도 닿고 금강산에도 닿는다. 금강산을 지나면 오봉산이요, 오봉산을 지나면 철령, 추가령, 마식령 같은 그 늠름한 고개들은 모두 다 잘 있는지. 행여 배가 고파 울고 있지나 않은지. 흘리의 스키장에 서 있노라면 어느새 생각은 그렇게 백두대간을 따라 하염없이 북녘으로 달린다.

언제부터인가 ‘백두대간 종주’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아직 해 본 바 없으니 깊은 내막은 잘 모르되, 풍문에 듣기로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를 ‘답산(踏山)의 백미’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 ‘백두대간은 민족 정신의 표상’이라는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간악한 일제의 ‘백두산 지우기’에 밀려 길을 잃고 헤매다가 나중에는 또 분단이라는 두억시니를 만나 허리 잘린 지 반 백년. 아직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채 조국 산천을 떠돌아다니는 우리의 백두대간. 진부령의 흘리에 가면, 민족의 저 유례없이 험난했던 20세기의 운명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아직도 피흘리며 역사의 준령을 넘어가는 고단한 백두대간이 거기 있다.


조선 4대 사찰의 하나, 건봉사

진부령 개척에 관한 기록은 『수성지』에 나온다. 간성에서 영서로 통하는 고갯길이 매우 좁고 험하여 인조 10년(1632)에 관에서 역승(役僧)을 모집하여 처음 개설했다고 한다. 1632년은 『수성지』의 저자 택당 이식이 간성현감으로 재직할 무렵이니 아마 도 그가 진부령 개척을 주도한 주인공인 모양이다. 또한 당시의 노동의 주체가 역승 이라 했으니 이는 틀림없이 진부령 아래의 큰절 건봉사 승려들이 대부분을 이루었으리라.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가 처음 지어 원각사라 하였다는 천년 고찰이다. 한때는 설악산의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는 물론 금강산의 장안사와 유점사까지도 모두 이 절이 거느렸다. 임진왜란 때에는 서산과 사명을 앞세운 승군의 집합처이자 근거지였고, 무려 100여 기가 넘는 부도(浮屠)가 보여 주듯 쟁쟁한 법통을 이어오던 불가 수행의 요람이었다. 조선 4대 사찰의 하나로 꼽히던 건봉사의 운명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잿더미가 되면서 그만 막을 내렸다. 전쟁 이후에는 민통선에 갇힌 채로 그저 빈 절터에 허튼 계절만이 쓸쓸히 오고 가다가 얼마 전 마침내 일반의 드나 듦이 허용되었다.

한때 민통선 안의 땅이었으니 건봉사 가는 길은 오로지 군사시설뿐이다. 진부령 길에서 시오리 남짓 눈 쌓인 비포장길을 들어서야 마침내 건봉사에 닿는다. 들어올 때는 잘 모르지만 전쟁통에 유일하게 불길을 벗어났다는 불이문(不二門=일주문)을 지나고 나면 금세 포근한 어머니의 품안처럼 문득 마음이 순해진다. 고만고만한 봉오리들이 사방을 둘러쳐 흡사 한 송이 어여쁜 연꽃 속에 들어앉은 느낌이다.

나중에 풍수가의 책을 뒤져보니 건봉사터는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란다. 그러나 실물이면 몰라도 산천의 생김을 보고 연꽃과 매화를 분간할 재주가 내게는 없으니 아무 꽃이면 무에 상관이랴. 아, 다만 아무렇게나 살아가도 그만인 잡놈의 눈 빛마저 온전히 또렷해지는 저 극락의 땅이여!


『 '마음도 쉬어가는 고개를 찾아서' 에서 발췌, 김하돈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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