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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간칠정맥/백두대간[完]

백두대간 14구간(이화령 - 하늘재)







구간코스
1일차 : 이화령 - 조령샘 - 조령산 - 신선암봉 - 923봉 - 795봉 - 깃대봉 - 조령제3관문
2일차 : 마역봉 - 북암문 - 동암문 - 부봉 - 959봉 - 주흘산 갈림길 - 평천재 - 탄황산 - 하늘재
(총 거리 : 23 km, 산행시간 : 1일차 4시간 40분, 2일차 4시간 25분, 총 9시간 05분 소요)

준비물
물 1리터, 토마토 2개, 귤 4개, 영양깽, 초고렛, 육포, 코펠, 버너, 라면 2개, 김치 약간
기타 : 복은소금, 랜턴, 카메라, 콘충 퇴치약, 무릅보호대, 스틱, 우비, 등산지도, 나침판






들어가기

이번 산행길도 혼자다. 동서울터미널에서 10시15분발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11시 55분에 충주에 도착했다. 터미널 여직원에게 이화령 가는 길을 물으니 이화령에 터널이 뚤린 이후로 휴계소를 지나던 버스는 없어졌다며 연풍가서 택시를 타라한다. 수안보를 경유해 13시 10분에 연풍에 도착했다. 인근 식당에서 청국장으로 한끼를 해결하고 택시를 이용, 13시 50분에 이화령에 도착했다(요금 6,000원) 사진 몇장 찍고 14시 정각에 이화령을 출발, 목적지인 문경새재(조령제3관문)에 16시 40분에 도착했다. 조령약수로 목을 축이고 고사리 주차장 방향으로 발길을 돌려 민박집에서 여장을 풀었다. 민박집(새재황토방, 043-833-5506)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어 주인양반이 권하는 묵밥과 동동주로 저녁식사를 하고 1일차 산행을 마무리 했다.

이�날 아침일찍 눈을뜨니 비가 청승맞게 내리고 있었다. 여간해서 그칠 기색이 없어 보인다.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밖을 내다보니 아까보다 더 세차게 쏟아 붓는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지만 아까운 시간만 흘러간다. 평소 간식이나 과일을 싸가지고 다니던 지퍼팩을 이용해 등산화에도 비옷을 입혔다. 채비를 하고 민박집을 나서니 9시 20분이다. 30분간 걸어 산행 들머리인 조령제3관문에 도착, 마역봉으로 향한다. 마역봉 정상에 올라 3관문쪽을 바라보니 운무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비에 젖고 땀에 젖고 이래 저래 젖으니 아에 우비를 벗었다. 스치는 나무잎의 빗물에 스원함은 느끼지만 배낭의 무게는 자꾸만 늘어 나의 어깨를 짖누른다. 하늘재에 도착하니 2시20분, 이제 빗줄기도 가느러 졌다. 삼 사십분 걸어 미륵리 주차장 부근의 식당으로 들어가 샤워도 하고 요기도 했다. 곁들여 동동주도 한잔 걸쳤으니 운무가 산허리를 휘감은 월악산은 내 시야를 벗어날줄 모르고 한참이나 지나더니 이윽고 충주행 버스가 내 시야를 돌려 놓네. 이때가 4시 20분, 승차요금 천원으로 한시간 만에 충주에 도착하니 바로 동서울 행이네. 7시 강변역, 2호선에 탑승, 염치불구하고 노약자 좌석에 히프를 댄 후 끄덕 끄덕 서너번 하니 집에 도착.








충북 괴산군 연풍면소재지(上)와 점심먹은 식당(下)




이화령



이화령에서 바라본 문경방향



이화령, 산행 들머리



이화령에서 산불감시초서를 지나 조령샘까지 너덜지대가 3곳이 있다



헬기장과 조령산




조령샘




조령산 정상(1025 m)



조령산 바라본 백화산(좌)과 백두대간



조령산에서 5분거리에 있는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신선암봉(앞줄 좌), 923봉(앞줄 우), 깃대봉(두째줄 중간)
신선봉(세째줄 좌), 마역봉(세째줄 우), 월악산(맨뒤줄 우측)



전망대에서 바라본 부봉. 그 뒤로 포암산과 좌로 만수봉도 보인다.







대간길 이정표



대간길에서 바라본 괴산군 원풍리



대간길의 야생화(나리꽃)



신선암봉 오르는 암릉길, 좌측으로 절벽이 수백미터나 된다.



암릉길에서 조망한 923봉과 부봉



신선암봉 오르다 뒤돌아본 대간길, 조령산과 저멀리 백화산이 보인다.



신선암봉(937 m)



조령산과 백화산(좌)



신선암봉에서 뒤 돌아본 백두대간, 2째줄 좌는 이만봉 능선 그 뒤로 희양산,
오른쪽으로 구왕봉과 주치봉, 저 멀리 대야산과 속리산 주능선도 조망된다.



신선암봉에서 조망한 928봉과 부봉



신선암봉에서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



신선암봉에서 바라본 주흘산



신선암봉을 내려오며 조망한 신선봉(좌)과 마역봉(우)



923봉 오르며 뒤돌아 본 조령산에서 신선암봉으로 이어지는 대간길



삼거리 갈림길



삼거리 갈림길 지나서 조망한 깃대봉, 신선봉, 마역봉



795봉 오르기전 평바위에서 조망한 부봉



목적지가 눈앞에, 15분 걸릴 듯



깃대봉 정상



깃대봉 정상에서 바라본 걸어온 대간길
좌측 뒤 희미하게 보이는 백화산, 중앙에 뽀족히 솟은 조령산
우측의 신선암봉, 중앙에 923봉과 암릉구간, 좌측 하단 795봉




깃대봉 정상에서 조망한 신선봉

대간종주 두째날 아침



지퍼팩으로 만든 등산화 빗물 가리개, 확실히 효과가 있었음



1박한 민박집(조령산 자연휴양림내에 위치)



조령3관문으로 가는 도로, 여기서 40분 정도 걸린다.







문경새재(조령제3관문)에 있는 선비(과거길) 동상
옛부터 영남에서는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갔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남쪽의 추풍령과 북쪽 죽령 그리고 가운데 새재가 있는데 영남의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금기가 있어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 급제를 위하여 넘던 과거길이다




조령제3관문과 조령관문의 유래 안내문



마역봉 오르다 뒤돌아 본 문경새재




마역봉 정상



동암문터에 있는 이정표




주흘산 갈림길



탄항산(월항삼봉) 정상에서 조금지나 전망대에서 바라본 주흘산(1106m)



탄항산(월항삼봉) 정상에서 15분쯤 지나 두 번째 전망대 옆에 있는 바위



14구간 종료 지점인 하늘재




14구간 종료지점에서 3 km 지점에 있는 하늘재 표시석과 장승




미륵사지에 있는 석귀부



미륵사지 5층석탑(보물 제95호)
삼국시대부터 고려말까지 남북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로인 계립령로에 위치한 미륵사지에 석불입상, 석등, 오층석탑이 북쪽을 향해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6m의 석탑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위로 받침돌과 1층 기단을 만든 후 몸돌을 올려놓았다. 바위 안쪽을 파내어 만든 기단 면석 한 면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일반적인 탑의 모습과 비교할 때, 지붕돌의 너비가 몸돌에 비해 아주 좁으며 각 부분의 조성기법이 형식적이고, 각 층의 체감률도 고르지 못해 투박하고 둔중한 감을 주고 있다. 미륵대원지와 함께 마의태자와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나 확실치 않다.



미륵사지 석불입상(보물 제96호)
미륵리 절터의 주존불로 특이하게 북쪽을 향해 서 있으며, 본래 석굴식 법당을 이루고 있었으나, 석굴의 목조건축물이 불탄 후 석축만 남게 되었다. 석불의 표정이나 신체 등의 조각솜씨는 불상 및 절터의 규모 및 석굴에서 풍기는 웅장함과는 달리 아주 소박한 편이다. 다른 부분에 비하여 유달리 흰 얼굴은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며, 불상의 거대한 원통형 몸체, 소박한 조각솜씨, 머리의 갓(보개), 엉성한 옷주름 표현 등을 볼 때 고려초기 충청도 지방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륵리 주차장에서 바라본 하늘재



마역봉 정상에서 한 컷



고도표
 


문경새재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로다

조선시대 백두대간을 근간으로 한 산경체계(山俓體系)에 의해 나뉜 아홉 개 나랏길의 대명사, 문경새재. 영남대로의 관문이요 육로교통의 요충이었던 그 길이 20세기 내내 풀숲에 묻혀 있다가 유신시대의 복원작업을 통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조선왕조 5백 년의 영화와 삶의 애환이 스며 있는 세 개의 관문을 지나며 군데군데 오롯한 옛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면, 그 시대 사람들의 두런두런 발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길의 내력이란 딱히 시간의 유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과거와 현재, 또는 미래로 나누는 시간이란 길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 무의미한 구분이다. 길은 저 까마득한 지난 시절부터 아주 오랜 훗날까지 언제나 제 스스로 열리고 제 스스로 닫힌다. 사람들은 으레 자기들이 길을 열고 닫는 줄 여기지만 정작 길은 사람들과 별반 상관없이 자유자재하다. 오랜 옛날 목숨 가진 것들이 세상을 오가는 행로로부터 길이 열렸고, 사람 또한 그런 길 위를 지나는 길손에 불과할 뿐이다.

길에 대하여 겸허하지 못한 종족은 기어이 멸종한다. 그리하여 길에 대한 심성적인 외경을 지닌 짐승들은 결코 길 위에서 길을 잃는 법이 없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길의 섭리로부터 축출당하는 일이다. 어느 때부턴가 사람들이 길을 다만 쓰고 버리는 소모품으로 인식하면서 사람들은 마침내 길을 잃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옛길이란 길들의, 혈통의 전승을 규정하는 말이다. 이듬해 다시 뿌릴 씨앗을 시렁 위에 소중히 얹듯,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가슴에 품는 길의 종자다. 옛길이란 결코 쓰고 버린 잊혀진 길이 아니다.


조선시대의 나랏길 아홉개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아홉 개의 나랏길(국도)이 있었다. 그 첫째는 파주ㆍ평양ㆍ정주를 거쳐 의주로 가는 길이며, 둘째는 철령을 넘어 함흥ㆍ길주ㆍ경흥을 지나 서수라에 이르는 길이며, 셋째는 원주를 지나 대관령을 넘고 삼척ㆍ평해에 이르는 길이며, 넷째는 충주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대구ㆍ부산에 닿는 길이며, 다섯째는 넷째 길의 문경 유곡역에서 갈라져 상주ㆍ진해로 통영에 이르는 길이며, 여섯째는 공주ㆍ전주ㆍ남원ㆍ진주로 통영에 닿는 길이며, 일곱째는 여섯째의 삼례에서 갈려 정읍ㆍ나주ㆍ해남을 거쳐 제주에 이르는 길이며, 여덟째는 여섯째의 소사에서 갈라져 평택을 지나 보령에 이르는 길이며, 아홉째는 김포를 지나 강화로 가는 길이다.

물론 이 모든 길들은 한양에서 출발하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기점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이다. 이 밖에도 요즘 말로 지방도로쯤에 해당하는 많은 작은 길들이 다시 이 아홉 개의 큰길을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적혀 있는 권근(權近, 1352~ 1409)의 말을 빌려 보자. “나라의 길에는 10리에 여(廬, 초막)가 있고 30리에 숙(宿, 여관)이 있다.” 또는 “공(公)과 사(私)의 구분과 상(上)과 하(下)의 구분이 엄하였다.” 나라에서는 국도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역(驛)과 원(院)을 설치하여 운영했다. 역원은 나라에서 직접 관여하는 곳도 있었고, 지방의 관청에서 관리하거나 곳에 따라서는 민간에 위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용한 두번째 문장에서 보이듯, 이러한 길 위의 편의시설들은 한결같이 나라의 공적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공공시설이 목적이었다. 더불어 한 시대의 체제가 규정하는 양반과 평민의 구분을 엄격히 적용받는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아무려나, 정작 길만은 반상을 캐묻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너나없이 아홉 개의 국도를 통하여 조선 팔도를 왕래했다. 상(上)은 으레 역원에서 묵고 먹었으며, 하(下)는 있으면 주막이요 없으면 민가의 남는 구들을 빌려 묵고, 또한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었다.

길의 크고 작음을 따지는 일은 길의 눈으로 보면 아주 부질없고 또한 서운한 일이겠으나,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그 길이 연결하는 고을들의 크고 작음에서 연유한다. 가령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길을 따지자면 누구나 경부고속도로를 꼽는다. 그것은 그 길이 나라의 제1도(都)와 제2도를 연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나라에서 가장 큰 고개를 따지는 일도 그 길이 넘는 유일한 백두대간의 고개, 즉 추풍령을 꼽는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길은 경부고속도로요, 가장 큰 고개는 추풍령이다. 만약 강릉이 부산보다 더 큰 도시라면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길은 영동고속도로가 될 것이요, 더불어 가장 큰 고개는 영동고속도로가 넘는 유일한 백두대간의 고개 대관령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섭리는 나라 국토 경영의 근간을 올곧게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하는 산경체계(山徑體系, 오늘날의 산맥이론과 구분되는 우리 나라 고유의 지리 인식체계)에 두었던 옛날에는 한결 명징하고 일목요연했다.

같은 이유로 조선시대에는 아홉 개의 국도 가운데 제4로와 제5로가 넘어가는 문경새잿길이 가장 큰 길로 대접받았다. 아홉 개의 국도 중 그 어느 길이 중요하지 않았을까마는 딱히 그 길이 가장 중요한 대접을 받은 것은, 다시 말해 그 길이 경유하는 경상도의 여러 고을과 그 백성들의 숫자에 힘입은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통행량이다. 게다가 그 길의 배후에는 우리 나라와는 도무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나라 일본이 있었다.

『영조실록』에는 아주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남아 있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신사(信使) 행렬이 얼추 1천 명이나 되므로 이들이 모두 같은 역참을 경유하는 부담을 덜기 위해 좌로(左路, 죽령)와 우로(右路, 추풍령)로 분산시켜 통행하게 하자는 영의정 김재로(1682~1759)의 제안이다. 그리하여 정사(正使)는 중로(中路) 즉 문경새재로 돌아오고, 부사는 좌로, 종사관은 우로로 분산하여 귀국시키자고 부연한다. 문경새재의 통행 규모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 밖에도 문경새재를 이용하는 발걸음이 어찌 이뿐이었겠는가. 문경새재는 그야말로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육로교통의 요충이었다.


나라 고갯길의 대명사

먼저 간단한 문제부터 하나 풀어 보자. 나라의 가장 중요한 길이었던 제4로 가운데 다시 가장 중요한 요충으로 문경새재를 꼽았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제4로의 곳곳에는 문경새재보다 더 험하고 한결 지나가기 어려운 지형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 조선을 먹겠다고 현해탄을 건너온 왜군이 유독 문경새재에만 온갖 촉각을 곤두세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는 ‘백두대간의 고개이기 때문에’가 그 정답이다.

이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강물을 거슬러 오는 것이다. 물은 반드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르므로, 가령 문경새재 고갯마루에 내린 빗방울이 서로 갈라져 한 줄기는 낙동강이 되어 부산으로 가고, 또 한 줄기는 한강이 되어 한양으로 흘러가는 것을 거꾸로 추적해 올라온다면, 문경새재가 한양과 부산의 가장 높은 정점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만약 한양에서 부산에 이르는 제4로 곳곳에 문경새재보다 높고 험한 산과 고개가 수백 개라 하더라도, 문경새재의 빗물이서로 나뉘어 각각 한양과 부산으로 흘러간다는 조건이 있는 한, 한양과 부산의 관문은 오로지 문경새재뿐이다. 이것이 바로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즉 산경의 원리다. 산경의 원리를 알지 못하면, 조선시대 한양을 방어하기 위한 관방시설을 철령이나 대관령, 그리고 문경새재처럼 한결같이 백두대간에 설치한 까닭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런 까닭에 제4로 하면 딱히 문경새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문경새재는 아예 그곳을 경유하는 제4로의 대명사가 되었다. ‘새잿길’ 하면 다만 새재를 넘는 그 고갯길만이 아니라 한양에서 부산에 이르는 제4로 전체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저 유명한 <진도아리랑>의 한 대목,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로다” 역시 그렇게 탄생했다. 평생 그 고개를 구경 한 번 해 보지 못한 진도 사람들에게도 고개 하면 으레 문경새재를 떠올릴 만큼 새재의 상징성은 컸다. 고쳐 말하자면 한 발 더 나아가 제4로뿐만 아니라 조선 팔도 고갯길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조선왕조 5백년의 영화가 서린 길

연구가들은 새재의 개척 연대를 대략 조선시대 초기로 잡는다. 그 이전까지는 지금의 문경 관음리와 충주의 미륵리를 연결하는 하늘재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하늘재는 삼국시대 초기, 정확히는 신라 아달라왕 3년(156)에 개척되는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고개 계립령(鷄立嶺)의 요즘 이름이다. 새잿길을 새로 낸 까닭은 아마도 계립령이 문경에서 동쪽으로 일정 정도 우회하며 충주로 넘어가는 탓이 아닌가 싶다.

새재의 이름에 대하여 세간에 나도는 이야기는 무수하다. 가령 새들도 넘기 어려운 험한 고개라거나, 억새가 많이 우거진 고개, 또는 서울로 가는 제일 빠른 샛길이라는 뜻으로 새재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런 명칭의 유래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계립령, 즉 하늘재 길을 두고 새로 닦은 고개이므로 새재라 했을 가능성에 제일 비중을 두는 편이며, 혹은 계립령과 이유릿재(현재의 이화령) 사이에 놓였으므로 새재라 불렀을 가능성도 아예 무시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다.

새재는 『세종실록지리지』 문경현 편에 ‘초점(草岾)’이라는 지명으로 등장한다. 이 책은 “현에서 서쪽으로 19리 떨어진 충주 통로에 있는데 험로가 7리에 이른다”고 적었다. 새재에 지금과 같은 관문이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10월 무렵이다. 충주의 수문장 신충원이 성을 쌓아 길을 막고 지나는 왜군을 기습했는데, 이것이 설관의 시작이라 했다. 때는 선조 27년이니 왜장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미 새재를 넘어 충주에서 용장 신립(1546~1952)을 죽인 지 2년이 지난 다음이다. 지금처럼 세 곳의 관문이 모두 모습을 갖춘 것은 숙종 34년(1708)의 일이다.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새재가 누린 영화는 일제 강점기에 이화령으로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막을 내렸다. 삼국시대부터 계립령, 조선시대는 새재, 일제부터는 이화령으로 고갯길이 변천한 것이다. 그러나 한양과 서울을 잇는 가장 큰 길의 역할은 문명의 시대가 되면서 이화령이 아닌 추풍령으로 옮겨 갔다고 해야 정확하다.

20세기 내내 풀숲에 묻혀 있던 새재 오솔길은 유신시대에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하여 지금과 같은 형태의 도로작업이 황급히 이루어졌다고 촌로들은 증언한다. 지금의 새재는 ‘문경새재 도립공원’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소문난 관광지가 되었으니, 한때 나라의 제1 고개로서 누리던 옛 영화를 어느 정도 되찾은 셈이다.


옛길이 남긴 새재의 보물들

문경새재에 남은 옛길의 흔적 가운데 단연 첫손에 꼽히는 유물은 세 개의 관문이다. 관문이란 단어의 사전 풀이는 ‘국경이나 요새의 성문’이다. 중국 책 『삼국지』에는 관우가 유비의 가족을 빼내어 첩첩의 관문을 필마로 탈출하는 유명한 장면이 등장한다. 그처럼 너른 땅덩어리가 못 되는 우리 나라에서는 다만 한양을 방어할 목적으로 설치한, 앞서 언급한 철령관이나 대관 그리고 조령관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비록 복원이기는 하나 여태 성문이 존재하는 곳은 새재가 유일하다. 관문이 세 개인 까닭은 1관문에서 3관문까지 둥그렇게 자연지형과 인공의 성곽을 둘러친 포곡식 산성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새재의 영화를 짐작케 하는 유지는 두 곳의 원(院) 터다. 1관문과 2관문 사이의 조령원은 아직도 그 주추며 돌담이 온전히 남아 있고, 3관문 아래 동화원은 그 터만 남았다. 1관문 옆에 자리잡은 새재 서낭당은 지천 최명길(1586~1647)과의 일화를 남긴 처녀 서낭신으로 유명하고, 3관문 옆에 있는 새재 산신당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약수로 유명하다.

그 밖에도 옛것은 아니나 그래도 옛길의 정취를 감안하여 길섶에 복원한 주막이 있으며, 옛날 그 어느 시절엔가 세운 ‘산불됴심’ 비석에는 그 길의 연륜이 함께 서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군데군데 더러 남아 있는 옛 오솔길을 걷는 재미는 여느 구경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새재만의 보물이다.

아쉬움에 하나만 더 꼽자면, 지금은 이미 사라져 버린 최후의 새재 마을 ‘상푸실’이다. 상푸실은 얼마 전 막을 내린 모 방송국 사극의 무대로 만들어진 모형건물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1관문과 조령원 사이에 있던 상푸실은 새재가 공원이 되면서 하나씩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언감생심 조령원은 말할 것도 없고 주막에 들 형편마저 못 되는 사람들이 남는 구들이나 헛간을 얻어 하룻밤씩 묵어 가곤 하던 곳이다.

사극 무대건물의 들목 삼거리에는 불과 대여섯 해 전까지만 해도 차마 그 마을을 버리고 떠나지 못하던 마지막 새재 사람이 살았다. 그는 바로 집 맞은편에 있던 옛 주막을 기억하는, 주막 옆의 한약방 집 손자였다. 최후까지 완강히 버티던 그가 마침내 상푸실을 떠나면서 5백 년 새잿길의 전승은 끊어졌다. 상푸실이 이 땅에서 사라져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다시 한 번 자연의 길과 인간의 길을 생각했다. 인간의 길인 새재는 비록 문을 닫았으나, 자연의 길인 새재는 변함없이 우리 가슴속에 뚜렷한 옛길의 종자 하나가 되어 남아 있을 것이라고.

『 '문화와 나' 에서 발췌, 김하돈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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