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06. 10. 18, 11. 7.
구간코스
10. 18일 : 하늘재 - 포함산 - 관음재 - 937봉 - 844봉 - 꼭두바위봉 - 부리기재 - 박마을
산행거리 : 14.7 km, 산행시간 : 13:44분 하늘재 출발, 19:10분 박마을 도착, 5시간 26분 소요
11. 7일 : 박마을 - 부리기재 - 대미산 - 새목재 - 차갓재 - 황장산 - 황장재 - 985봉 - 폐백이재 - 벌재
산행거리 : 18.3 km, 산행시간 : 10:05분 박마을 출발, 17:50분 벌재 도착(황장산 쉼터 1박), 7시간 45분 소요
총 거리 : 33 km(접속구간 6 km 포함), 총 소요시간 : 13시간 11분 소요)
교통편
갈때 : 10월 18일, 10:40분 동서울터미널에서 월악산 행 버스 탑승, 13:13분 수안보 경유 미륵리 하차, 13:44분 하늘재 도착 후 산행시작,
11월 17일, 07:20분 동서울터미널에서 문경행 탑승, 09:25분 문경, 10:05분 택시로 박마을 도착
올때 : 10월 18일, 박마을에서 문경(택시), 문경버스터미널(20:20분)->강남 센트럴시티
미륵리 주차장 가는 길
미륵사지 5층석탑과 석불입상, 가을의 분위기가 완연하다.
하늘재 가는 길
이곳에서 좌측으로 비포장 길을 따라 20여분 걸으면 하늘재에 도착
하늘재, 문경시 문경읍과 충주시 상모면 잇는 597번 비포장 지방도로 월악산 국립공원에 속해있다.
포함산 오르다 뒤돌아 본 탄항산(우)과 주흘산(좌)
포함산 오름길의 소나무 쉼터
포함산 오름길의 암릉 구간
포함산 정상(962 m)
포함산 정상에서 조망한 부봉(좌), 깃대봉(중) 마역봉(우)
포함산 정상에서 조망한 만수봉과 덕주봉
포함산 정상에서 조망한 관음재, 838봉(사진 중앙), 937봉(우측 뽀족봉)
관음재
809봉에서 뒤돌아 본 포함산(좌)
809봉에서 뒤돌아 본 주흘산
809봉에서 조망한 844봉(앞쪽),1032봉
2006. 11. 7. 박마을 - 벌재
박마을에서 조망한 부리기재(상)와 대미산(하)
부리기재, 용하구곡과 중평리 박마을을 잇는 고개마루
간밤에 눈이 내려 5 cm 가량 쌓여있다.
대미산 정상(1,115 m)
대미산 정상에서 조망한 문경 운달산(1,097 m)
대미산 정상에서 조망한 돼지등(안쪽 능선), 저 멀리 보이는(사진 중앙) 공덕산, 천주산(뽀족봉)
대미산 정상에서 조망한 백두대간 황장산(1,117 m)
대간길에 핀 눈꽃
문수봉 갈림길, 대간길 이정표에 백두산은 처음인듯
나무가지에 쌓인 눈을 스틱으로 헤쳐가며...
923봉 조금 지난 지점
차갓재, 문경시 동로면 소재
지리여장군, 백두대장군
뒷면에는
'통일이여! 통일이여! 민족의 가슴을 멍들게 한 철조망이 걷히고 막혔던 혈관을 뚫고 끓는 피가 맑게 흐르는 날
대간길 마루금에 흩날리는 풋풋한 풀꽃 내음을 맘껏 호흡하며 물안개 피는 북녘땅 삼재령에서 다시 한번
힘찬 발걸음 내 딛는 니 모습이 보고 싶다.' 라는 통일의 염원을 담은 글귀가 적혀 있다.
작은 차갓재
황장산 오름길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안생달 마을
황장산 오름길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미산(중앙), 981봉, 923봉, 차갓재
황장산 오름길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황장산 묏등바위
암릉구간(878 m)
암릉구간에서 바라본 대미산(상)과 문수봉(하)
묏등바위
황장산 정상(1,077 m)
황장산 정상에서 조망한 도락산
암릉구간에서 조망한 황장재, 천주산(좌)과 공덕산(우)
감투봉에서 조망한 1004봉, 폐백이재, 928봉, 벌재, 옥녀봉, 문봉재로 이어진 대간 능선
황장재
985봉 직전 전망대에서 바라본 투구봉(좌)과 도락산(우)
985봉
985봉에서 조망한 1004봉
치마바위 전망대에서 조망한 천주봉과 문경시 동로면소재지
어둠이 내린 벌재, 충북 단양군 방곡리 방향
계립령(鷄立嶺)에서 하늘재까지
하늘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권2 「신라본기」로 거슬러 오른다. 이 기록에는 아달라 이사금 3년 “여름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했다. 아달라왕 3년은 156년 이니 죽령 길의 개척보다 2년이 앞선다. 같은 책 권41 「열전」의 김유신 조에 등장하는 이름은 마목현(麻木峴)이다.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러 간 김춘추에게 보장왕이 말 하기를,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같은 책 권45 「열전」의 온달 조에는 “계립령과 죽령 북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온달의 출사표로 등장한다.
『고려사』에는 대원령(大院嶺)이란 이름이 보인다. 고려 고종 42년(1255) 10월에 몽고 장수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 “몽고군이 대원령을 넘자 충주에서 정예군을 보내 천여 명을 죽였다”고 기록하였다. 대원령이란 바로 미륵대원에서 시작되는 말이다. 연구가들은 미륵사지의 창건 연대를 대략 10세기로 어림잡고 고려시대의 절 이름을 대원사로 보는 견해에 거의 동의한다. 우리 나라의 역참이 전국적으로 체계를 갖추는 것 역시 고려시대이니 본래의 절에 원(院)을 두고 대원, 혹은 미륵대원이라 불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하늘재 또한 이 무렵에 대원령이란 이름을 얻는다.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는 마골점(麻骨岾) 봉수를 기록에 남기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면 비로소 이를 정리하여 “계립령을 사람들은 마골점이라 한다”거 나 “속칭 마골산이라 한다”는 기록으로 발전한다. 한편으로 궁금한 것은 미륵대원에 관한 기록이 사라지는 일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이미 새재 길이 새로 개척되고 하늘재 길은 점점 그 쓰임새를 잃게 되지만 가령, “관음원은 계립령 아래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처럼 여전히 하늘재 길의 역원이 등장하는 반면 유독 대원과 미륵사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길이 없다.
미륵사지에서의 하룻밤
오늘날의 이름으로 정리를 하자면, 미륵사지에서 문경 관음리로 넘는 고개를 하늘재, 수안보로 넘는 고개를 지릅재, 송계 골짜기로 남한강의 황강 나루에 닿는 길을 닷돈재라 부른다. 본래의 계립령이야 그런 자잘한 분별이 없었을 게 분명하고, 고려시대 미륵대원이 생기면서 계립령 고갯길이 나누어진 것으로 본다면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대원령과 마골점이다. 더불어 그런 이름들은 당연히 계립령을 대신하는 이름으로 쓰였다.
한때 발음의 비슷함을 빌미로 계립령(토종 발음은 겨릅재)을 지릅재로 믿었던 것은 그러한 내력의 대물림이다. 오늘날 역시 세 갈래의 고개 이름을 각각 달리 부르고 있지만 딱히 계립령이라 할 경우에는 세 고개를 모두 합쳐야 옳다. 어쨌거나 지릅재는 계립령이 그 뿌리일 터이고, 닷돈재는 옛 주막의 하룻밤 묵는 값이 닷돈인 탓에 생겼다 하나 하룻밤 숙박료치고는 비록 먹거리를 셈한다 해도 너무 비싸다. 오히려 도적이 길을 막고 닷돈씩 동행료를 물었다는 전설이, 어차피 전설이라면 훨씬 그럴 듯하다. 하늘재란 이름은 근처에 사는 시골 노인들의 기억으로 보아 기껏 조선시대 말기 에나 얻은 이름인 듯 싶다.
백두대간의 하늘재 고갯마루에서 오솔길을 타고 내리면 금세 미륵사지에 닿는 것을, ‘차량통행금지’란 푯말에 막혀 다시 문경을 지나고 이화령을 넘어 미륵사지로 갔다. 이미 날은 어두워 국립공원 매표소 직원마저 퇴근 준비를 하는 무렵이었다. 막 불 을 끄려는 주막에 들어 국밥과 막걸리 한 되를 말끔히 치우고 칠흑을 틈타 미륵사지로 기어들었다. 한뎃잠 자는 일에 이력이 난 뒤부터 언젠가 미륵을 보면서 하룻밤 자 는 게 오래 된 꿍꿍이였다. 그렇다고 텐트까지 칠 수는 없는 터라 그냥 차에서 침낭을 덮고 잠을 청했다.
『 '마음도 쉬어가는 고개를 찾아서' 에서 발췌, 김하돈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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