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06. 11. 8, 날씨 맑음. 구간코스 벌재 - 돌목재 - 문복대 - 옥녀봉 - 저수령 - 촛대봉 - 시루봉 - 흙목정상 - 솔봉 - 묘적봉 - 도솔봉 - 삼형제봉 - 죽령 산행거리 : 26.3 km, 산행시간 : 07:22분 벌재 출발, 16:30분 죽령 도착, 9시간 8분 소요 교통편 갈때 : 11. 7일 15구간 종주 후 황장산 쉼터에서 1박, 이튼날 백두대간 16구간 종주 시작 올때 : 죽령에서 단양까지 화물차 얻어 탐(택시 이용시, 이진호 011-9784-5949), 단양버스터미널에서 18:30분에 출발하는(막차)동서울행 버스탑승 후 20:25분 도착, 21:30분 집에 도착으로 16구간 산행 종료 1박한 황장산 쉼터(버섯찌게와 검은콩으로 만든 막걸리 맛이 일품) 황장산 쉼터에서 바라본 벌재 벌재, 문경시 동로면 소재로 975번 지방도로 벌재에서 능선 하나 넘으면 볼수 있는 문복대 안내문 문복대(1,074 m) 대간길에서 빗겨난 수리봉(좌)과 선미봉(1,080 m) 장구재로 내려오며 뒤돌아 본 옥녀봉 저수령, 단양군 대강면과 영주시 상리면을 잇는 973번 지방도로 저수령 휴계소, 간단한 식사와 음료, 간식거리를 구입할 수 있다. 저수령에서 촛대봉으로 오르는 들머리 촛대봉 촛대봉에서 바라본 장구재(좌) 옥녀봉(우) 멀리 천주산과 공덕산도 보인다. 투구봉을 향하여.. 한명이 앞서 지나간 흔적이 있다. 투구봉에서 뒤돌아 본 촛대봉(좌)과 옥녀봉(우) 시루봉 오름길에서 뒤돌아 본 촛대봉(좌)과 투구봉(우) 1084봉에서 배재를 향하여.. 배재 배재지나 봉우리를 내려서며 조망한 단양군 대강면 남조리(상)와 도솔봉(하) 싸리재 흑목정상(1,034 m) 솔봉의 삼각점(상)과 조망한 도솔봉 모시골 정상 묘적령 묘적봉(1,015 m) 묘적봉에서 바라본 도솔봉 도솔봉 직전의 암릉 암릉에서 조망한 도솔봉 암릉에서 조망한 묘적령, 모시골정상, 솔봉으로 이어지는 대간길 이정표 뒤로 좌측 솔봉에서 흑목정상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도솔봉의 헬기장과 정상표시석 헬기장에서 뒤돌아 본 묘적봉, 묘적령, 모시골 정상 헬기장에서 조금 올라온 지점의 도솔봉 정상표시석과 돌탑 도솔봉 정상에서 뒤돌아 본 지나온 백두대간 좌측 두번째 봉우리가 흑목정상, 싸리재, 봉우리 하나 넘어 배재, 잣나무숲봉(1084봉) 시루봉, 투구봉, 촛대봉, 저수령, 옥녀봉, 문복대, 928봉, 1004봉까지 조망된다. 도솔봉 정상에서 조망한 소백산 주능선, 제2연화봉(KT송신소), 연화봉과 제1연화봉(중앙에서 약간 우측) 비로봉, 국망봉, 상월봉까지 보인다. 도솔봉에서 조망한 삼형제봉(우측)과 1280봉(중앙) 삼형제봉 암릉에서 조망한 솔봉과 이정표 삼형제봉 암릉에서 뒤돌아 본 도솔봉, 묘적봉, 모시골 정상 하산길에 바라본 죽령과 소백산 주능선 죽령,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을 잇는 5번 국도 비와 바람과 장승과 주막이 있는 풍경 '죽령' 영주시 풍기읍. 산읍(山邑)에 비가 내렸다. 벌써 사 나흘 전부터 온다고 설쳐대던 장마가 기어이 서막을 여는 모양이었다. 4백리 한양길 죽령(해발 689m) 너머 기쁨의 도량 희방사와 인삼과 천하승지(天下勝地) 금계동을 품은 경상도의 첫 고을. 그리 번화하달 것도 없는 읍내 길을 물어 풍기 읍사무소에 들러 새로 펴냈다는 풍기읍지를 훑어보고 나오다가 문득 추로지향(鄒魯之鄕)이란 말이 생각나서 읍사무소 건너편 유림회관을 찾아갔다. 마침 소임을 맡은 서정학(77ㆍ 풍기향교 전교) 옹은 서울로 출타 중이고 평소에도 으레 그렇게 경로당을 삼는지 노인 서너 분이 모여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죽령에 관한 걸 물었지만 들은 이야기는 모두 풍기읍지에서 대충 읽은 것들이다. 전화번호를 적어 나오는 길에 혹시나 해서 죽령의 관문시설이 있던 자리를 물어보니 역시 아는 이가 없었다. 2천년 역사 속의 옛길 풍기읍을 벗어나면 바투 소백산(해발 1440m)이다. 격암 남사고(南師古)가 그야말로 “사람이 살 만한 산”이라 하여 넙죽 절하고 갔다는 바로 그 소백산. 백두대간이 태백산 어름에서 문득 서해를 향해 말머리를 돌려 내륙으로 달리다가 한껏 가쁜 숨을 몰아 쉬는 곳이 바로 소백의 연봉들이다. 일찍이 영남 좌도의 크고 작은 고을들은 모두 그 소백산에 기대어 죽령으로 한양 길을 열었다. 신라 아달라왕 5년(158년)에 죽죽(642년 대야성에서 백제의 윤충에 게 죽은 죽죽과는 동명이인)이 처음 고갯길을 닦은 이래 오늘도 변함없이 길노릇에 여념이 없으니 고개 나이 무려 1천8백 살이 넘었다. 죽령은 한때 백제의 손길이 닿기도 했다 하고, 한때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땅이었다가 종당에는 진흥왕의 영토가 된 삼국 결사쟁패의 접경이었다. 또한 죽령과 조령 이남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고향이었으니 거기 가서 견훤의 흉을 보다가는 찬물 한 사발도 못 얻어 마신다. 고려시대를 지날 무렵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우왕 8년(1382년)과 9년에 각각 왜구가 죽령을 넘어왔다는 기록이 『고려사』 에 남았다. 임진왜란에 관한 이야기로는 인조대의 청백리 김시양(金時讓ㆍ 1581~1643)이 지은 『하담파적록』에 실린 다음의 대목이 그 중 흥미롭다. 동양위 신익성(申翊聖)은 상촌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 지어 문장으로 자허(自許)하였다. 신미년에 그의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의) 『상촌집』을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그 속의 『동정록』에, “임진년에 적이 조령, 죽령 두 재로부터 올라왔다.”고 하였다. (중략) 내가 동양위에게 말하기를, “임진 년에 왜적이 조령과 추풍령을 거쳐 올라왔고, 죽령만은 적의 발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른 일이 없었는데 『동정록』에는 죽령으로 올라왔다고 말하였으며, (중략)” 하였더니 동양위는 얼굴빛이 변하여 돌아갔다. (『대동야승』 제72권) 비안개 속의 장승, 그리고 주막 옛날부터 죽령길은 오르막 30리, 내리막 30리라 했다. 산길 60리는 잰 걸음으로 군일없이 걸어도 하룻길이다. 풍기에서 점심을 먹고 떠난 길이기도 했지만 길을 찾느라 시간을 많이 버린 탓에 고갯마루에 닿으니 이미 땅거미가 내렸다. 비는 오락가락하고 안개 속에 다들 어디로 갔는지 산 아래 두고 온 마을도 통 보이질 않는다. 여태 온 길도 갈 길도 그 저 묘연하기만 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젖어 비 오는 죽령 고갯마루. 죽령 고갯마루는 충북과 경북이 서로 손 흔들고 헤어져 제 갈 길을 가는 곳이다. 문득 지난 일인 듯 홀연 산안개 걷히는 곳에 나무 장승 한 무리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샛길로 올라 금세 10여 기의 장승들이 버티고 선 마루턱에 닿았다. ‘소백대장부’와 ‘소백여장부’ 한 쌍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 가운데 터를 잡고, 좌 우로 크고 작은 장승들이 고갯마루 오가는 행인들을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다. 성 난 듯, 울부짖는 듯, 기어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그러면서도 슬쩍 웃음을 참는 장승 특유의 짓궂은 표정이 사뭇 싱그럽다. 소백대장부는 경북에서, 소백여장부는 충북에서 올라와 죽령 장승 부부가 되었단다. 장승에서 서너 행보 떨어진 곳에 일찌감치 사립에 붉은 등 내다 밝힌 초가 주막 한 채가 있었다. 이름하여 죽령 주막. 쪽빛 모시치마에 흰 저고리를 맵시 있게 차려입은 중년의 주모가 주살나게 문턱을 넘는다. 날은 저물고 그저 한 잔(?) 생각이 똥줄을 태웠지만 시절이 또한 시절인지라 어쩔 수 없는 일, 이빨을 악다물고 단양으로 핸들을 돌렸다. 이튿날, 주막집 채묵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안정자(43ㆍ 경북 영주) 씨는 영주서 횟집을 하다가 얼마 전 주막을 넘겨받았다고 했다. 물 좋고 바람 좋고 손님 좋은 것은 물론이고 벌이도 까짓 횟집에 댈 게 아니란다. 딸이 둘인데 하나는 중국에 공부하러 가고 하나는 대학엘 다닌다고 자랑이다. 팔자 좋아 산천 구경이나 다니는 사람하고 사진 한 장 찍자니까 금세 몸이 안 좋아 벗어두었다는 쪽빛 모시치마 를 차려입고 사립문에 선다. 벌써 그녀는 죽령의 냄새를 몸에 담은 모양이다. 소백은 다만 소백으로 산다 하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이 땅의 모든 국행제를 금지시켰다. 죽령 산신제 역시 마을 사람들의 손에 의해 근근이 그 명맥을 이었다. 매바우에선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과 9월이면 어김없이 산신제를 지낸다. 날짜는 초정(初丁)인데 초정에 부정(不淨) 이 들면 중정(仲丁)으로 넘겼다가 중정마저 부정이 들면 또 하정(下丁)으로 넘긴다. 도가(都家:제사 준비를 맡은 집)로 뽑힌 집주인은 목욕재계하고 3일 동안 기도를 올려 정성을 들인다. 매바우에선 마을 사람 누구라도 산신당에 대한 믿음은 가히 절대적이다. 산신당 가는 길에 앞장을 선 김성락 옹은 연방 한숨을 내쉬었다. 길도 하필이면 마을과 산신당 사이로 고속도로를 뚫어 그곳은 이미 비산비령(非山非嶺)의 참혹한 지경이 되어버렸다. 산마루까지 온통 민둥산이 되어 마치 가죽을 벗긴 짐승의 그것처럼 산천은 붉은 선혈을 떨구고 있었다. 죽령 북쪽 골짜기는 유독 심하여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을 감출 길이 없다. 죽령의 고갯길이 단양에 이르러 평지에 닿았다가 다시 슬쩍 솟구치는 곳이 남한강변의 적성산성이다. 국보 제198호 신라 적성비 또한 이곳에 있다. 마치 일부러 심술이라도 피운 듯 길은 그곳의 산마루까지 기어올라가 사정없이 산록을 벗겨냈다. 문득 멀리 돌아보니 그야말로 ‘사람이 살 만한 산’, 소백이 굽어보고 있다. 소백은 다만 소백으로 산다 하고. 『'마음도 쉬어가는 고개를 찾아서' 에서 발췌, 김하돈 글 』 ■ bgm : Carol Kidd - ♪ Seven Daffodil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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