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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간칠정맥/백두대간[完]

백두대간 17구간(죽령 - 고치령)

 



산행일자
2006. 6. 5, 날씨 맑음.

구간코스
죽령 → 1145봉 → 제2연화봉 → 천체관측소 → 연화봉 → 제1연화봉 → 1382봉 → 1395봉 → 비로봉
→ 1380봉 → 국망봉 → 상월봉 → 늦은맥이재 → 1061봉 → 마당치 → 1032봉 → 863봉 → 고치령
산행거리 : 24.8 km 접속구간 4 km, 산행시간 : 07:50분 죽령 출발, 16:13분 고치령 도착, 8시간 23분 소요





교통편
6. 4일 동서울터미널에서 단양행 막차(18:00) 탑승, 20:40분경 단양 도착, 터미날 앞 길건너 마늘식당에서 저녁식사 후 바로 옆의 여관에 투숙하여 1박, 6. 5일 06:00분 기상하여 식당을 찾았지만 문을 연 식당이 없어 수퍼에서 컵라면으로 대충 요기함, 점심용으로 황도 복숭아 2캔과 간식 구입 후 터미널 앞에서 06:50 출발하는 죽령행 버스 탑승, 07 : 40분경 죽령 도착 후 07:50분에 산행시작, 16:13분 고치령 도착 후 1시간 10분 걸어서 좌석리 도착, 수퍼에서 막걸리 마시며 영주행 버스 기다림, 18:20분 영주행 버스 탑승, 19:05분 영주 도착, 인근에서 저녁식사 후 20:30분 서울행(센트럴시티터미널)버스 탑승, 22:55분 서울 도착, 지하철 2호선 신도림역 하차.




지역특산품 판매장 옆에 있는 죽령표시석



17구간 들머리



뒤 돌아 본 마루금, 16구간의 삼형제봉과 도솔봉, 죽령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보인다.



전망대까지 곳곳에 마련된 쉼터



제2연화봉, 정상은 중계소가 자리 잡고 있고 출입통제임, 대간길은 좌로 이어진다.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연화봉(우), 비로봉(중앙), 제1연화봉(좌)



제2연화봉(중계소)를 우회하여 천문대 까지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



이정표



연화봉 오름길에 뒤 돌아본 제2연화봉(중계소)




천문대



천문대에 잠시 들러 이곳 저곳 살펴보고, GPS 상시 관측소



능선에 올라 바라본 도솔봉(좌)과 삼형제봉(중앙)



자연학습장 갈림길, 연화봉은 우측길로 진행



연화봉 오름길




연화봉(1,383 m)



연화봉 전망대



연화봉에서 뒤 돌아 본 천문대와 제2연화봉



전망대에서 조망한 제1연화봉에서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연화봉을 내려서니 울창한 숲길이 이어진다.



헬기장에서 올려다본 제1연화봉



제1연화봉 오르다 뒤돌아본 연화봉과 천문대



제1연화봉의 이정표



제1연화봉에서 뒤 돌아 본 연화봉, 천문대, 제2연화봉, 천문대 뒤로 삼형제봉과 도솔봉도 조망된다.



제1연화봉에서 조망한 1382봉과 비로봉



1382봉 근경



1382봉 오름길에서 뒤돌아 본 제1연화봉



1382봉 정상







1382봉에서 조망한 도솔봉(상)과 욱금리 금계호



1382봉에서 조망한 1395봉과 비로봉




1395봉의 이정표(상), 주목군락지와 비로봉(하)




6월과 1월의 비로봉





비로봉 직전의 이정표와 계단길



주목관리소





비로봉 정상



비로봉 정상에서 조망한 죽계구곡과 송림지.





비로봉 정상에서 조망한 주목군락지(상)와 국망봉 가는길(하)




이정표와 조망한 국망봉, 상월봉, 신선봉, 저 멀리 형제봉도 보인다.



겨울의 국망봉 능선




어의곡리 갈림길의 이정표와 조망한 어의곡리



어의곡리 갈림길에서 뒤돌아 본 비로봉




철죽



1380봉의 이정표



국망봉 오름길의 철죽군락지에서 뒤돌아 본 비로봉




국망봉(상)과 상월봉(하) 능선





국망봉







상월봉



상월봉에서 뒤돌아 본 국망봉




상월봉에서 조망한 신선봉 능선



상월봉에서 조망한 고치령으로 뻗어내린 백두대간



늦은맥이재



마당치



형제봉 갈림길



연화동 갈림길



고치령,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와 좌석리를 잇는 고개



고치령의 장승과 산신각




비로봉 정상에서 한컷



단양시외버스터미널 앞 시내버스정류장(고수대교)에서의 시간표




태백과 소백을 가르는 50리 험산 준령, 고치령

이 세상 어디에 매양 변치 않는 길이 있으랴. 산다는 게 으레 그렇고 그런 거라고 오래 믿어 두었지만, 정녕 허다한 어느 길이 흘러도 변함없이 지난날만 같으랴. 그리하여 다시 문을 열고 길 위에 서면 이미 한참 전에 떠나온 길인 듯 새삼 물결치는 저 엄청난 숙업과도 같은 시간들의 행렬을 보라. 아, 몸과 마음 슬쩍 길 위의 시절에 얹어 밤도 없이 낮도 없이 뒹굴어온 날들에게 경배를! 끝내는 몸 하나 마음 하나 우거진 풀숲에 고개 숙여 아주 작은 추억마저 지우고 숨죽인 씨앗처럼 견디는 여름의 사랑이여.

길도 때로는 꼬리를 친다. 팽팽하게 당겨진 연실이 빈 겨울 하늘 너머 아주 오래 된 이야기를 탱탱 끌어당기듯이, 길도 가물가물 멀어지며 다가서며 내내 꼬리치는 길이 있다. 사는 동안 그저 무심히 마음 한 켠 묻어두었던,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 생각들이 웅웅거리며 몰려나와 문득 어디론가 끌고 가는 미증유의 오솔길. 행여 그 길 끝에 천년 만년 기다려온 새 아침이라도 열리는지, 더러는 새도록 잠 못 이룬 그리운 님이라도 오시는지, 설레며 두근거리며 걷는 길이 있다. 흙먼지 폴폴 일어 바람 한 올 지나가면 신작로 따라 아득히 서서 울던 미루나무 슬슬 또 뒷걸음질치는.


아름다운 절, 평화로운 마을

풍기에서 소백을 따라 태백을 바라보면 길은 바야흐로 소문도 자자한 부석사(浮 石寺) 길이다. 절도 절이거니와 산천 또한 유별하고 기운이 비범하여 허튼 걸음으로 가 닿아도 언뜻 대화엄의 그림자를 밟고 돌아오는 가람. 백두대간이 문득 내륙으로 말머리를 돌려 서해를 향할 적에 그 남쪽 아래로 달아나는 영남의 산천을 붙들어 두기 위해 한 곳에 기둥을 세워 고삐를 묶었으니 부석사 절터가 바로 그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 곳에 닿은 이들은 그 장중한 땅기운에 실려 그만 ' 나'를 잊으니 굳이 절집 아니어도 참말 도량 중에 도량이다.

부석사 길에 걸린 마을은 순흥, 단산, 부석 3개 면(面)이다. 본래 이들은 모두 순흥도호부를 따르던 마을이다. 시절이 바뀌면서 영주군이 되고 다시 영풍군이 되었다가 이제는 어엿한 영주시가 되어 하나씩 저마다의 면목을 거느린다. 논농사 를 주업으로 삼고 사과나 인삼같은 밭작물로 목돈을 만진다. 하나같이 인구 고작 2천에서 3천 명을 헤아리는 여두소읍(如斗小邑)이지만 물 좋고 인심 좋은 걸로 치면 그만한 땅이 더는 없는 곳이다. 부석사가 소문을 타면서 인파가 모박이 를 하는 탓에 더러 돈벌이를 궁량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나마도 여느 관광지와는 비교할 바 없이 단출하다. 반도 이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로 단연 첫 손에 꼽히는 부석사 입장료는 단돈 1천원. 좀 달라졌겠지 하고 다시 가보아도 여태 주차비를 받지 않는, 부석사는 그런 절이다.

단산 면소재지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권중팔(81)옹은 본래 안동이 고향인 사람이다. 한약방은 대를 이어온 그의 가업이다. 한때 그는 만주 길림까지 흘러가 한약방을 열었다가 이 곳 단산에 터를 잡은 지 어언 40년이 넘었다. 그의 팔십 평생은 올곧게 약재더미에 묻혀 흘러갔다. 늘그막에 막상 정리를 하자니 왠지 서운하여 아직 붙들고 있다고 했다. 보꾹에 옹기종기 매어 단 약낭마다 한 움큼씩 그의 지난 풍상의 시절들이 담겨 있다. 약초 찾아 산마루 깨나 밟았을 듯하여 큰 산 너머 영월로 가는 고치령을 물으니 갈림길을 일러준다. 고치령에 가거들랑 연화동에 꼭 한번 들러보란 말도 함께.


연화동천 가는 길

부석사 길을 버리고 단산에서 길을 바꾸면 잘 닦은 포장도로가 10리 남짓 큰 산 발치로 기어든다. 산이 생기기를 사각이라 하여 모산이란 마을도 스쳐가고 마을 앞에 널찍한 바위가 놓였다 하여 좌석이란 마을도 지나간다. 흐르는 물이 좋아 냇가에 앉으면 물도 지나치게 맑아 오래 머물기가 민망하다. 새벽에 깨끗이 씻고 나온 맨발이 자꾸만 부끄럽다. 다만 저 또한 흐르는 바 되어 맑고 어린 여울들은 세상으로 나아가며 재잘거린다. 졸졸졸졸.....

포장이 끝나는 길에서는 그만 세상의 모든 길도 함께 끝이 난다. 사람들은 돌아 서고, 흥청망청 따라오던 세상의 불빛들도 발길을 멈추고 이제 문명의 세상이다 했음을 알린다. 그로부터는 이제 길 아닌 길들의 세상이다. 이미 오래 전에 잃고 버린 뒤안의 길들만이 슬금슬금 그 지지리도 못난 자갈밭을 길로 삼는다. 아무렴, 이 세상 어디에 꽃수를 놓아 펼친 꿈결 같은 비단길이 있으랴. 그저 가고 가는 길. 만고강산 재 넘어가는 나비 춤사위면 또 어떠랴. 잃고 버린 뒤에야 비로소 이렇듯 가벼워지는 게 세상의 길인 것을. 잠시 고치령을 비켜 5리 남짓 연화동 가는 길엔 생전 처음 맡는 향내가 난다.

첫눈에 벌써 연화동은 아예 세상과 인연 없는 사람들의 땅이다. 높고 푸른 산이 사방을 가로막고 두어 뼘 하늘은 아득히 쟁쟁하다. 마을이랄 것도 없이 대여섯 집이 군데군데 외딴 집처럼 흩어져 숨어 있고 이웃끼리 오가는 동네 길은 우거져 풀숲을 이루었다. 몇 집을 기웃거리다가 겨우 인기척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정연우(68) 씨는 6대를 연화동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터줏대감답게 그는 연화동의 지난 내력과 골골마다 들어앉은 옛이야기를 줄줄이 꿰어낸다. 그는 40년 이력의 소백산 심마니다. 소백산 구석구석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아마도 없을 거란다. 더덕, 속단, 산작약 같은 약재를 주로 캐지만 동안에 거둔 산삼만도 1 백 뿌리가 족히 넘는 진짜 '읫꾼'이다.


태백 산신과 소백 산신이 만나서

풍수에 연화부수(蓮花浮水)라는 말이 있다. 물위에 뜬 연꽃이라 하였으니 거기 연화동처럼 생긴 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연화부수 형국의 명당을 품은 탓에 마을도 그렇게 연화동이란 이름을 얻었다 한다. 산도 좋고 물도 좋다. 도무지 사람 냄새 적으니 늘 외롭지만 때로는 그런 일 또한 좋다. 언제고 꼭 한번 다시 와서 밤새도록 그 산바람 소리 같은 옛이야기를 듣겠노라고 정연우 씨에게 인사를 건네고 연화 동을 나서는데 이름 모를 산새가 운다.

고치령 고갯길은 본래 바탕도 험상한 흙먼지 길인 것을 지난 장마에 군데군데 패이고 무너져 여간만이 아니다. 하늘은 낮게 내려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슬슬 길마저도 어둡다. 해맑은 물소리는 산 아래로 내려가고 숲처럼 생각 많은 세상 사람 하나 자꾸 꼬리를 감추는 산구비를 거슬러 오른다. 길이란 게 으레 거칠고 험한 만큼 애써 지나고 나면 돌아보는 기쁨 또한 더욱 큰 법. 고갯마루 올라 저 아래 세상을 보면 정녕 애가 달아 나부끼던 도회지 날들 여태 거기 그렇게 바람 불고 있으리.

큰 산 태백과 소백은 그렇게 나뉜다. 고치령에 이르러 마침내 태백은 끝이 나고 이로부터 바야흐로 소백이 시작된다. 고치령 고갯마루 아담한 산신당에는 그리하여 태백 산신과 소백 산신을 함께 모신다. 사람들은 북쪽 영월에서 죽은 단종을 태백 산신이라 믿고 남쪽 순흥으로 유배되었다가 안동에서 죽은 금성대군을 소백 산신이라 믿는다. 그들 조카와 삼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고개 고치령이 오죽 이나 한스러웠으랴. 지금도 정월 열 나흗날이면 어김없이 산신제를 지내니 형과 삼촌에게 죽은 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함이란다.


영북의 영남, 외로운 마락리

왠지 아득한 마음이 되어 산신당을 둘러보는데 저희들 마음도 그와 같은지 온갖 들꽃들이 빼곡 산신당을 둘러 피었다. 엷은 보랏빛 무릇꽃이 지천으로 피었고 듬성듬성 샛노란 참나리가 산들거린다. 잔대꽃도 다투어 하늘빛 종소리를 달고 있다. 일삼아 생각을 놓고 한참을 앉았으니 다들 무에 그리 하고픈 말이 많은지 산신당 둘레가 온통 들꽃 소리로 가득하다. 가끔은 누구라도 와서 들어주어야 하는 것을, 이야기만 자라 산그늘을 덮는다.

이미 백두대간을 넘었지만 땅은 아직도 경상도 땅이다. 산신당 고갯마루 남쪽의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북쪽의 물은 장차 한강에 닿지만 웬일인지 영북과 영남의 경계는 보이지 않는다. 짐짓 올라온 길의 두 배는 될 법한 내리막길 끝에 그렇게 외떨어진 경상도 마을이 하나 숨었으니 이름하여 마락리(馬落里)다. 슬그머니 백두대간을 넘어와 유일하게 한강수계에 터를 잡은 경상도의 서러운 의붓아들. 마을 골짜기 말굽이 바위에서 순흥과 영월을 오가던 보부상 행렬의 말들이 자주 떨어져 죽었다 하여 이름을 그렇게 부른다.

한때 고치령 너머 단산면 옥대초등학교의 분교가 마락리에 있었다. 1964년에 문 을 열어 모두 147명의 졸업생을 세상으로 내보낸 마락분교는 지난 1991년 문을 닫았다. 산간에 이미 아이 울음소리 그쳤으니 학교인들 더 무슨 소용이 있었으랴. 집도 하나같이 낡은 옛집이고 골짜기 논밭들도 많이 묵었다. 벼농사의 벌이가 워낙 시원찮은 탓인지 논이며 밭이며 모두 기장이나 율무 같은 밭작물을 심었다. 버스가 다닐 리 만무한 이 궁벽한 오지 마락리에 사는 일이 참으로 신통하기만 하다.


태백과 소백이 품은 은둔의 땅

골짜기를 따라 마락리 서낭당을 지나면 길은 마침내 충청도로 넘어서니 그 곳이 바로 정감록의 땅 의풍이다. 의풍 또한 그로부터 사방 어느 길이든 몇 십리 큰 재를 넘어야만 대처로 통하는 충청도 제일의 오지 마을이다. 동쪽으로 마구령(해 발 820)을 넘으면 바투 부석사 기슭으로 내려서고 서쪽은 면소재지 영춘으로 넘는 50리 베틀재가 가로막혔다. 남쪽은 고치령이요, 북쪽으로 삿갓 시인 김병연의 무덤이 있는 노루목을 지나면 영월에 닿는다.

의풍 골짜기 끝에 여섯 집이 사는 어은동(마을의 생김이 고기가 숨은 모양이라 하여 그렇게 불린다) 뒤편에 솟은 삼도봉(해발 1063)에서 강원과 충북과 경북이 갈린다. 가장 큰 마을인 솔밑에는 장터거리가 있다. 한때 삼도의 행상들이 모여 제법 큰 난장을 벌였지만 지금은 새술막 하나도 남은 게 없다. 솔밑에 사는 박경환(51)씨는 정감록의 비결지(秘訣地)를 찾아 의풍에 자리를 잡은 조부로부터 4 대를 이 곳에서 살았다. 그때만 해도 억센 내륙의 장꾼들이 모두 모여 사람 구경, 돈 구경, 싸움 구경으로 신물이 났었다고 옛날을 회상한다.

의풍 사람 열의 아홉은 한결같이 정감록의 후예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들은 태백과 소백이 품은 정감록의 비결지가 바로 의풍이라 믿는다. 와골에 사는 조광노(47)씨 역시 정감록 한 권 달랑 품고 청송에서 이 곳으로 솔가하여 온 조부 이래 4대를 살았다. 그의 부친이 그러했고 그의 삶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산간에 그저 있는 대로 심고 거두어 욕심 없이 산다.

김창현(69, 와골)씨는 30여년 전에 본인이 직접 삼척에서 솔가하여 의풍으로 왔다. 한문 공부가 깊은 그는 정감록이 아니라 격암 남사고의 비결서를 보고 이 곳에 뿌리를 내렸다 한다. 그는 지금도 손수 농사를 짓는다. 삶이 이미 황혼에 닿았지만 그의 몸짓 하 나, 말 한마디는 더없이 정갈하고 공손하다. 언뜻 비승비속(非僧非俗)이란 말도 제 값을 다 못하는 듯 싶다.


길을 노래하던 시인 길에 잠들고

우리가 누구라서 다르랴. 까마득히 먼 날에 집을 떠나 세세생생 모래알처럼 많은 낮과 밤을 풍찬노숙으로 흘러가고 또 흘러가는 저 시냇물을 닮은 것을. 어디로부터 와 장차 또 어디로 가는가. 한 하늘과 한 대지의 저 도도하고 거침없는 율법 아래 오직 인생유전이란 말이 날마다 날마다 시름겨워 몸 뒤척이는 것을. 사람과 세상의 일이 본래 그렇게 아득하였으나, 그러나 가슴에 시퍼렇게 날이 선 칼빛 하나를 품고 삿갓으로 일월을 가렸던 시인이 바로 난고 김병연(1807-1863)이다.

의풍에서 북쪽으로 10리, 김삿갓 무덤으로 가는 길은 험로 중의 험로이다. 전에 더러 배짱 좋은 참배객들이 승용차를 끌고 그 길로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장마 끝이라 그런지 아예 엄두를 내는 이가 없다. 더러 지프차들이 굉음을 내며 덤벼드는 게 고작이다. 그나마 서울 번호판을 단 승합차 한 대가 길에 빠져 옴나위없이 길이 막혔다. 가다보면 더러 그렇게 속절없이 빠져들고 마는 게 우리네 길인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노루목 가는 그 길은 참으로 묘한 데가 있다. 진작에 덫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걸려들고 싶은.

노루목은 언제나 술판이다. 몇 해 전부터 동네(동네라야 모두 다섯 집이다) 아낙 몇몇이 비닐집을 짓고 주전자에 담은 술과 안주를 파는데 어느 누구든 그냥 지나 치는 법이 없다. 자나깨나 으레 술마시는 일밖에 달리 길이 없었던 시인의 무덤에 왔으니 그저 한잔씩 마시자는 얘기다. 고치령을 함께 넘은 사진작가 홍창식 형은 무덤 앞 골짜기를 뒤덮은 차일이 영 눈에 거슬리는 모양이다. 그냥 두자고 했다. 아니 우리도 그냥 그 하늘을 가린 차일 속으로 들어가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다.

歸兮亦難佇亦難 幾日彷徨中路傍
돌아가자니 그도 어렵고 머물자니 그 역시 어려워 그저 몇 날이고 길을 헤매다가 길섶에 스러지노라

<「蘭皐平生詩」 마지막 구절>

『'마음도 쉬어가는 고개를 찾아서' 에서 발췌, 김하돈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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