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지마할(Taj Mahal)
인도 아그라의 야무나 강변에 세워진 타지마할은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인도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형식의 묘지이다. 무굴제국의 5대 황제였던 샤 자한((Shāh Jahān, 1592~1666))이 그의 14번째 아기를 낳다가 숨을 거둔 아내 뭄타즈 마할(Mumtax Mahal)을 위해 건축한 무덤으로 타지마할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이다.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22년 동안이나 이 무덤을 지었다는 한 남자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이 깃들었기 때문일까? 인도 이슬람 예술의 걸작 타지마할은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순백의 대리석은 태양의 각도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빛깔을 달리하며 보는 사람의 넋을 빼놓고, 웅장한 건물은 중압감은 커녕 오히려 공중에 떠있는 듯 신비롭고, 수로를 기준으로 4분할 구조로 만들어진 정원 및 타지마할과 좌, 우의 건축물은 좌우대칭의 완벽한 균형미와 기하학적 조형미를 느끼게 한다.
□ 무굴(Mughul)제국 16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인도 지역을 통치한 이슬람 왕조(1526∼1857)이다. 무굴제국의 시조 바부르는 중앙아시아를 전전한 후 카불을 점령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1526년 인도에 침입, 델리 왕조인 로디조(1451~1526)의 이브라힘 왕을 델리 북방의 파니파트전투에서 격파하고, 델리를 점령하여 여기에 무굴제국을 창시하였다. 이때 바부르는 화약과 대포를 이용하여 10배의 상대군을 격파하였다. 바부르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인 제2대 후마윤은 벵골·비하르 지방에서 일어난 아프간계(系) 수르 왕조의 셰르 샤에게 패하여, 1540년 페르시아로 도망갔다가 1555년 재차 델리를 점령하고 일시 중단되었던 무굴 왕조를 부활시켰다. 그 뒤를 이은 왕이 13세에 즉위한 악바르 황제이다. 그는 북인도에 지배력을 확보하게 되자 그 세력을 인도의 다른 지방까지 확대하여, 라자스탄 지방에 독립국으로 있던 라지푸트족의 왕(라자)들을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1573년 서방의 구자라트 지방에 진격하여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왕조를 타도하였다. 동방으로는 1576년 벵골 지방까지 그의 지배하에 넘어왔다.
1580년대에는 인도 북서부지방의 펀자브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까지도 군대를 파견하여 인더스강 하류 신드 지방까지 정복하였다. 1590년대에는 남하정책으로 데칸 지방의 이슬람 여러 왕조에도 세력을 뻗어나갔다. 행정면에서도 악바르 황제는,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중용하여 각 지방의 토지측량이나 지세(地稅) 결정 등의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따라서 무굴제국의 행정 ·사법 ·지방행정 등의 지배체제는 악바르 황제 시대에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악바르 황제의 사후 자항기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로 이어져 이 시기는 무굴제국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특히 제6대 아우랑제브는 데칸의 이슬람 여러 왕조를 정복하여 최대의 판도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의 만년인 1674년 힌두교도들이 데칸지방에 마라타왕국을 세워, 무굴제국의 강력한 적대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707년 아우랑제브가 데칸고원의 원정 도중 죽자 제위(帝位) 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무굴의 중앙 권력은 급속히 쇠퇴해졌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약화된 무굴의 중앙권력은 데칸지방에서 델리 주변까지 세력을 확장한 마라타동맹에 의하여 좌우되어, 무굴 황제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영국의 식민지 지배세력은 마라타, 마이소르 등 강력한 봉건세력을 멸망시키고, 인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갔으나, 명목상으로만 존속한 무굴 황제의 지위는 그대로 남겨 두고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1857년, 북인도를 중심으로 ‘세포이의 반란’이 일어나자, 각 주둔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도의 병사들이 델리에 집결하여,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추대하여 새로 정권을 수립하였다. 2년에 걸친 이 반란이 영국군의 무력으로 진압되자, 그들은 탄압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그때까지 명목상으로만 남겨 두었던 무굴 황제의 지위를 폐함으로써 무굴제국은 멸망하였다. |
타지마할의 위치
타지마할 지도와 각 부위 명칭
주차장에서 요런 빵차를 타고 서문(상위 지도의 1번)입구에서 내려 검색대를 통과한 후..
타지마할로 향한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타지마할의 정문(지도의 7번)에 도착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 흰대리석의 타지마할이
고색창연하게 빛을 발하며 우뚝 솟아있다.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며 감격하는 순간이다.
좌측의 회랑
저 끝에 있는 유료 화장실(10루피)을 다녀온다.
무굴가든(Charbagh)에 세워진 타지마할(Taj Mahal)
하루에도 다섯번이나 색깔을 바꾼다는 타지마할, 지금은 흰색을 발하고 있다.
샤 자한은 아그라 시내에서 보석가게를 운영하던 바노 베굼을 보고 한눈에 반해 이곳 무굴가든에서 결혼식을 치루고 황비로 맞아들였다.
그녀를 끔찍이 사랑한 샤 자한은 그녀에게 ‘궁전의 꽃’이라는 의미의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샤 자한은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숨진 아내의 죽음을 애통해하면서 무굴제국의 국력을 총집결하여 국가의 재정이 기울어질 정도의 거액을 들여
사상 유례가 없는 화려한 무덤을 건설하게 된다. 바로 저 앞에 보이는 타지마할이다.
정문과 무굴가든의 수로
수로에는 분수시설이 만들어져 있고 수로 옆으로 사이프로스(Cypress)나무를 심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1632년에 시작된 공사는 무려 22년 만에 완공 되었는데 무굴 제국은 물론 페르시아, 이란, 아프카니스탄를 비롯한 외국의 건축가와
세계 각지에서 전문기술자들이 불려왔고 여기에 동원된 연인원은 20만 명에 이르며 건축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1,000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정문위에 장식된 2열의 차토리 수는 22개로 타지마할을 건설하는데 22년 걸였음을 의미한다.
차토리는 산스크리트어로 우산을 의미하는데 모양은 둥근 원에 가깝고 크기는 돔보다 작다.
타지마할은 인공으로 만든 7m 높이의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한 면의 길이가 58m이고,
중앙 돔의 높이는 65m에 달한다. 그리고 동서남북의 모퉁이에 세워진 미나레트(Minaret)의 높이는 42m 이다.
무굴 제국의 고전적인 차르박(charbagh) 양식에 맞추어 설계된 바지차(Bageecha)정원
중앙의 긴 수로는 이슬람의 코란에 등장하는 풍요로운 천국의 연못을 상징한다
이곳 기단부터 내국인은 맨발로, 외국인은 이곳에서 제공하는 덧신을 신어야 입장할 수 있다.
무덤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 다양한 꽃 문양과 이슬람 경전인 코란의 글귀가 새겨진 화려한 벽면으로 치장되어 있다.
좌측이 왕비인 뭄타즈 마할(Mumtax Mahal)의 묘이고
우측이 황제인 샤 자한((Shāh Jahān)의 묘로 이 묘들은 참배객이나 관광객을 위한 가묘이고 진짜 묘는 이곳 지하에 안치되어있다.
아그라 성의 무삼만 버즈에 유페되어 8년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을 바라보며 아내를 그리워 했던 샤 자한은 죽어서야 아내 곁으로 올 수 있었다.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
뭄따즈 마할은 샤자한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지어준 이름으로 그녀의 본명은 아르주마나드 바노 베굼(Arjumanad Bano Begum)으로 19세때 샤 자한과 결혼해 18년 동안 13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전쟁터에서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병을 얻어 1631년 6월 17일에 사망, 그때의 나이 39살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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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키에 미인은 아니었지만 꾸밈없는 밝은 성격과 돋보이는 지성으로 주변 사람을 늘 즐겁게 하였고 샤자한의 마음을 헤아려 하나부터 열까지 배려하는 모습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다. 샤자한은 이런한 왕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소박함, 지성, 배려, 사랑의 결실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말임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타지마할 서쪽에 위치한 이슬람 사원 '모스크(Mosque, Masjid) '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사람들(무슬림)
‘빛을 두는 곳, 등대’를 의미하는 미나레트(minaret, 42m)
밖같쪽으로 약간 기울어지게 설계됬다. 이유는 천제지변으로 붕괴되더라도 본 건물인 타지마할을 덮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러 짐에 따라 황금빛으로 물드는 타지마할
사랑의 슬픔을 간직한채 유유히 흐르고 있는 야무나 강(Yamuna River)
무덤 내부를 둘러보고 이곳으로 나와 벽에 새겨진 문양들을 자세히 살펴본다.
내, 외부 벽면은 장밋빛 석류석과 터키산 옥, 산호, 황금빛 호반석과 비취, 그리고 녹색 옥 등의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했다.
아라베스크풍의 꽃 장식과 띠 모양의 장식, 그리고 다색의 피에트라 듀라(pietra dura, 대리석에 무늬를 박아 넣는 기법)로
외관을 장식한 캘리그래피(calligraphic) 경문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타지마할 동쪽에 세워진 자와브(jawab)
서쪽의 모스크와 대칭을 이루며 구조는 모스크와 똑같다. 자와브는 영빈관으로 사용되고있다.
타지마할은 무굴제국, 이란, 페르시아, 아프카니스탄 4개국 건축가들의 합작으로 지휘 감독은 이란 출신 건축가 이사칸이 했고 각 분야별로 보르도, 베네치아 등지의 기술자들이 참가하였다. 이때 사용된 돌은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우즈베크, 이탈리아, 프랑스에서까지 구해온 것으로 가히 세계적 공사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춥고 더운 날씨에도 견딜 수 있는 순백의 대리석은 무굴제국의 라자스탄에서 운반해 온 것이다.
지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작품으로 남기려고 타지마할 완성 후 샤 자한은 4명 건축가들의 손목을 잘랐다고 전해지지만 확인된 사실은 없다고 한다.
이제 타지마할은 완연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다.
흔히 ‘백색의 진주’나 ‘꿈의 궁전’으로 불리는 타지마할은 낮에는 흰색으로 보이지만 아침에는 자줏빛, 황혼녘에는 황금빛, 그리고 보랏빛과 푸른빛 등
그 색채가 5색으로 변화한다고 한다. 보름달 밤의 달빛에 반사되어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타지마할은 지반이 약한 야무나 강변에 지어졌다.
기단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까? 궁금했었는데 비밀은 인도에서 자생하는 말고사 나무에 있다.
말고사 나무를 잘라 물속에 넣으면 철보다 더 단단해지고 수축을 반복한다 한다. 다시 말해 스프링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몇개 단위로 말고사 통나무를 묶어 세우고 이를 묶음 단위로 연결하면 단단한 지반 역할을 한다고 가이드가 설명해 준다.
우리는 나가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온다.
못에 투영된 타지마할의 모습과 사람의 모습이 조화롭다.
이렇게도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인류에게 남겨준 무굴제국은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샤 잔한은 왜 뭄따즈 마할을 그토록 사랑했을까? 뭄따즈 마할은 어떤 여인이었을까?
이곳 타지마할에 머무르는 동안 이런 생각으로 내 머리를 꽉채웠던 호기심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이제 정문이 가까워 보인다.
타지마할은 정문에서 약 250m 떨어져 있다. 중앙의 수로를 중심축으로 하여 좌,·우측이 정원, 연못, 나무 등과 함께
완벽한 대칭 구조로 되어 있으며 건물에 사용된 기하학적 계산의 완벽함은 지금의 건축학자들이 보아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지금 왕과 왕비는 타지마할의 지하 묘실에 안치되어 영면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비록 수많은 관광객의 방문으로 조용한 시간을 보내지 못할지언정 그들은 지금 또 다시 긴 여행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 그것은 분명 인간의 커다란 소망이고 꼭 이루고 싶은 로망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랑을 꿈꾸고 있을 뿐 그것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생애가 끝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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